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21.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3-태극기부대와 최후의 인간

두쪽을 두쪽내기. 행복을 찾는 사람들

니체 전집 한국 번역본에서 다수 필사 메모함.


5.

이쯤에서 말을 마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한번 군중을 바라보다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이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웃고들 있구나.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 이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보다.

그렇다면 저들이 눈으로라도 들을 수 있도록 먼저 저들의 귀를 때려 부숴야 하는가? 북과 속죄 설교자처럼 요란을 떨어야만 하는가? 혹 저들은 말더듬이만을 믿는 것일까?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지? 교양이라고 부르지. 그런 것이 있기에 저들은 염소치기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지. 그렇다면 나 저들의 자부심에다 대고 말하련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 말종-최후의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서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자신의 목표를 세울 때가 되었다.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최고희망의 싹을 틔울 때다.

토양은 아직도 그러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옥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도 척박해져 지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큰 나무도 이 땅에서 자라나지 못할 것이다.

슬픈 일이로다! 사람이 더 이상 사람 저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신의 활시위를 울릴 줄도 모르는 때가 오고 말 것이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는 아직 그러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

슬픈 일이로다!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로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지? 인간말종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박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들이 날뛰고 있다. 저들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말종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

사람들은 아직도 일에 매달린다. 일 자체가 즐거운 소일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소일거리로 인해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

돌볼 목자는 없고 가축의 무리가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해지기를 원하며 실제 평등하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제발로 정신병원으로 가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세상이 온통 미쳐 있었지.’ 더없이 명민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사람들은 총명하여 일어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는 조소에 끝이 없을 수밖에. 사람들도 다투기는 하지만 이내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자신들의 조촐한 환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이쯤에서 사람들이 ‘머리말’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이야기는 끝나고 말았다. 대중의 고함과 환성이 그의 말을 막았던 것이다. 저들은 외쳐댔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인간말종을 내놓아라. 우리로 하여금 인간말종이 되도록 하라! 우리가 그대에게 위버멘쉬를 선사하겠으니!” 군중은 이렇게 환호하고는 혀를 차댔다. 차라투스트라는 서글퍼졌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나 이와 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보다.

나 너무 오랬동안 산 속에서 살아왔나보다. 시냇물소리와 나무들의 속삭임을 너무 많이 들어왔나보다.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 저들에게 말하고 있으니.

내 영혼은 흔들리지 않으며 오전의 산줄기처럼 환하다. 그런데도 저들은 나를 냉혹한, 끔찍한 농담이나 하는 조소자쯤으로 여기고 있구나.

나를 바라보고는 웃고들 있구나. 웃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미워하는구나. 저들의 웃음 얼음처럼 차디차구나.“ ... ...






/


 니체가 말한대로 신은 죽었지만, 오늘날 행복은 하나의 신앙, 종교가 되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든 연애와 사랑을 말하든 과학기술로 인한 미래의 진보를 말하든 그것이 행복이라는 결과물을 낳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대학에 가는것도 취업을 하는 것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우리는 배워왔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행복을 쫓아가도 괜찮은걸까. 아니 최소한 정말로 그렇게 행복해지기위해 노력하면 행복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걸까?


지난 글에서 니체는 위버멘쉬,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창조하는 존재가 되라고 말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을 찾느라 이미 바쁘다. 그리하여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땅의 힘이 쇠약해지고 사람이 더이상 저 너머로 활을 쏘지 못하게 된다. 잠깐, 그런데 니체는 천상의 설교에 자신의 신체를 가두는 기독교를 철저히 비판하지 않았던가? 저 너머로 활을 쏘는 것은 천상의 설교를 늘어놓는 기독교와 과연 어떻게 다른걸까? 이런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끊임없이 대지, 땅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그렇다면 사람이 현재 자기 이상의 저 너머로 활시위를 겨냥하는 것도 플라톤처럼 육체를 천시하고 영혼만 보내서 천상계의 이데아 같은 장소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발로 가보지 못한 다른 대지를 겨냥하며 활을 쏘는 전사를 하나의 모델로 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또다시 이중적인 풍경을 보았다. 6월 여름치고는 아직 작년만큼 매서운 무더위는 아니지만 분명 모두가 더위에 지치기엔 충분한 땡볕이 오늘도 홍대 거리를 지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더위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홍대 차도를 행진하며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번갈아 흔들면서 문xx 빨갱이 박xx 탄핵무효 등을 온몸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니체가 말한 조그만 행복만을 찾아다니는 최후의 인간일까 아니면 혹시 그들도 자신을 극복해 위버멘쉬를 향하는 과정일까


이전의, 5년 전쯤의 나라면 이런 고민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쉽게 결정하고 판단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익숙한 탑골 공원 종로일대를 벗어나 젊음의 거리라고 불리는 홍대 한복판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과 가치를 외치고 타인이 듣던 말던 자기 신념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그 주장의 합리성이나 옳고 그름 이전에 인간의 예의로서 경청해봐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오히려 내가 내 세대가 많은 홍대거리에 점점 익숙해지고 나와 다른 타자들이 가득한 탑골공원 쪽은 그저 경멸하고 멀리했다면 니체와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서, 그 후에 논리 토론을 하거나 사상 논쟁을 해봐도 늦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물론 나는 내 입장을 쉽사리 바꾸긴 어려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성급한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다. 그들을 옹호하거나 지지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단순히 세대 대결이나 혐오 조리돌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한 책의 제목차럼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천천히. 나비처럼 느릿하게 춤 한 가락씩 몸을 움직여보자.



작가의 이전글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2-초인? 슈퍼맨? 위버멘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