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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24. 2019

오심은 악이고 비디오판독은 선일까?-헤겔 라캉 지젝

정치철학 에세이 2.5 홍대동 조커 190211

 축구의 오심이라는 현실과 지젝의 라캉이 말하는 실재- 정치철학 에세이2.5 20190211

                                                       

  -홍대동 조커 반백수 LS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아시안컵 16강전이 얼마전 벌어졌다. 바레인을 상대로 1-0 한골차로 이기는 가운데 바레인 공격수가 한국 최종 수비수보다 앞쪽에서 패스를 받는 반칙, 즉 오프사이드로 골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황당했지만 심판은 반칙을 선언하지 않았고, 경기는 1-1 연장전에서 극적인 결승골로 한국은 겨우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손흥민을 비롯해 체력이 고갈된 한국팀은 8강에서 카타르에게 무기력하게 지고 말았다. var, 비디오 판독은 대회 8강부터 적용이 가능했기에 벤투 한국감독은 추후 항의를 통해 정당성만 입증받을 뿐이었다.


 물론 한국축구팀의 패배는 체력뿐만이 아니라 상대팀의 전력, 선수의 부상, 동기부여 부족, 다양한 전술의 부재 등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아시안컵 대회 주최측에서도 인정했듯이 명백하게 실재적으론 오프사이드 반칙인데도 심판이 판정한 현실에서는 반칙이 아니란 것은 경기를 바꿔놓은 큰 변수였다. 이렇게 실재the Real와 현실reality이 갈라지는 듯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선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헤겔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라캉주의 좌파 철학자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같은 거창한 타이틀로 불리기도 하고 “MTV 철학자”같이 한때의 지적 유행, 좌파 상업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되기도 한다. 헤겔이나 라캉에 대해서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비롯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등 지젝에 대한 입문서의 언어들을 빌려서 RSI 지젝의 철학 개념과 주장에 대해 축구의 오심과 관련하여 간략하고 흥미롭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흥미를 돋구는 차원에서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왜 적지 않은 축구선수와 감독들이 비디오 판독의 도입을 거부하거나 늦추려고 할까? 심판의 실수나 주관성 등으로 인한 오심이 줄어들면 스포츠라는 승부의 세계가 더 진보하는 것 아닌가? 설마 그들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구닥다리식 세계의 수호자들인 걸까?


 이를 위해 먼저 지젝이 따르는 라캉의 RSI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RSI는 세 가지의 약자로 the Real-실재(계) the Symbolic-상징계 the Imaginary-상상계로 흔히 번역된다. 라캉은 인간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이 RSI삼항조로 설명하려 한다. 상상계는 유니콘 황금산같이 현실엔 없을 수도 있는 언어 이전의, 이미지들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계약, 의무같이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 대타자(신,아버지 등)the Other가 관장하는 질서, 현실의 세계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언어라는 질서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틈새, 상징화에 저항하는 구멍이라고 볼 수 있다. 지젝이 말하는 체스 게임의 예로 좀 더 살펴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 -지젝의 how to read 라캉 18-19p     


 축구를 예시로 들어본다면, 축구는 각 팀의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는 손으로 공을 만지면 반칙이고 발로 골넣는 스포츠란 것이 상징계, 축구의 질서이자 현실이다. 그리고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라는 각자의 포지션과 명칭이, 이미지들의 상상계가 존재하지만 수비수가 최전방으로 전진해서 공격수처럼 활약하거나 -아시안컵 8강전에서 실제로 수비수 김민재가 마지막 10분동안 최전방에서 계속 헤딩볼을 경합했다- 또는 공격수가 False nine -가짜 9번 역할로 골을 넣는 게 아니라 다른 선수가 골을 넣도록 수비수를 혼란시키는- 지루, 메시같은 공격수가 존재한다. 골 넣는 수비수나, 골이 주 목적이 아닌 가짜 공격수라는 이런 상상계는 이것이 계속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새로운 질서, 상징계로 등록되는 것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경기중에 고양이, 관중이 난입한다던가, 심판의 착오로 명백한 골을 노골 선언하는 사건 등이 실재(계)이며 이것은 기존의 상징계, 대타자의 질서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는 Jouissance 향유, 향락으로 번역되는, 쾌락원리를 초과하여 죽음이라는 고통에 다가가는 쾌락의 장소다. 비디오 판독을 거부하는 축구선수는 바로 이러한 질서를 벗어나는 의외의, 쾌락을 초과하는 향락이라는 욕망(실재의 열정)을 축구에서 없애지 말자고 하는게 아닐까.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라고 로쟈 이현우는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21세기의 시작을 돌이켜 보면 미국의 911 쌍둥이 빌딩 파괴라는 사건,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상계에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며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라고 로쟈는 말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히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는 국가라는 상상, 시스템에 구멍이 났고 현재 우리들의 삶은 이대로 과연 지속가능한지 묻게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미국이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 한국에서 동성애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고 국가를 혼란시키는 것은 북한에서 온 빨갱이가 활동하는 것이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동성애자들과 싸울 뿐만 아니라 ‘치료’해야 한다는 일부 극우 기독계의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영화 매트릭스 1편을 예로 들자면,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축구판에서도 이렇게 현실 대신에 환상을 동원해서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일은 널려있다. 한때 한국팀이 중국팀에게 0-3으로 최초로 대패했을 때, 손흥민같은 1군 베스트일레븐 선수가 다 안모여서 졌을 뿐이라던가 심판이 원래 할머니가 중국 혈통이라던가 중국에게 매수된 게 틀림없다는 등 막장 판타지 소설스러운 루머를 퍼트려서라도 실재를 부정하고 싶었던 게 나를 포함한 대다수 한국 축구팬들, 풋볼클럽 대한민국 서포터들, 대중들의 정서였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선 또 다른 글에서 다뤄야 하겠다. 그리고 이때 환상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의식과 떼어내서 생각하기 어렵다. 지젝 또한 이 지점을 파고 든다.


 이데올로기는 주로 '이념‘ 또는 ‘허위 의식’이라고 번역되면서 단지 가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21세기 탈이념의 시대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고 쉽게 폄하되어 왔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반지성주의라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또한 알튀세르가 익히 말해온 대로 이데올로기는 단지 관념이 아니라 물질성을 갖기에 가족 학교 스포츠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의해 끝없이 의례로서 반복되고 실천되기에 끝없이 귀환하는 것이다. 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주된 근거는 스피노자이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이데올로기 이론은 이후 수많은 논쟁을 불러왔고, 지젝도 이 논쟁에 뛰어들어 알튀세르가 주로 의거하는 스피노자를 헤겔-읽기-라캉-기계(이안 파커)의 입장에서 비판한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 지젝은 자신이 알튀세르의 제자인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알고 있으며 만약 마슈레가 주장하듯 스피노자가 마치 헤겔보다 먼저 헤겔의 질문에 답했다고 주장한다면... 헤겔은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게서 배웠다고 주장한 기계적, 표현적, 구조적 인과성 등에 대해 이미 헤겔이 자신의 저서에서 그 개념을 선취했다고, 마치 ‘알튀세르 또는 헤겔’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을 역설하며 마슈레를 무효화하려고 한다. 니가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골을 넣었으니 나도 같은 반칙해서 골 넣을게 이러면 둘 다 동점이니 사실상 우리 둘 다 무효야 라는 농담같지만 농담만은 아닌 지젝의 글쓰기 방식이다.


 지젝이 이렇게까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를 맹렬히 비판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에티카1부 부록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국가 안의 국가’와 같다고, 하나의 환상이라고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 주요해 보인다. 지젝에게 스피노자의 세계는 사실상 주체의 결단도 책임도 삭제된 기계적 결정론의 세계이며, 이것은 ‘즐겨라!’ 라는 초자아적인, 타자의 욕망에 충실해지라는 명령만이 존재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역자인 이성민의 해설처럼, ‘선악과를 먹지 말라‘에 대한 스피노자적 독해의 현대적 판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경고! 이 사과는 나무에 농약이 살포되었으므로, 당신의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스피노자와 더불어 우리가 얻는 것은 라캉적 용어로 주인기표 없는 상징계이다. 이러한 상징계에서 ”소통은 주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곧바로 정서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지젝의 지적처럼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읽고 있는 여피YUPie족의 얼굴에는 “그 어떤 곤혹스러운 표정도 없고 단지 열정만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스피노자주의를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까지 비판하는 것은 지젝 자신이 스피노자주의(ex:들뢰즈) 라고 명시할만큼 알튀세르보단 들뢰즈의 반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또한 이후 본문에서 80년대 동유럽이 소련 공산당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이전 공산당이든 하이데거주의자든 모든 지식인들이 합동해서 정신착란 상태에서 자기 아내를 살해한 알튀세르와 그의 철학을 비난한 것을 부당했다고 알튀세르를 변호하는 점에서도 볼 때, 지젝의 스피노자주의가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은 알튀세르보다는 들뢰즈를 노골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판단이 아닐까. 물론 이 알튀세르와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유산을 공유하고 스피노자는 헤겔의 주요 적수라는 점은 유념해야 하겠지만.


 지젝의 다른 책인 ‘신체 없는 기관’에서는 제목부터 들뢰즈의 주요 개념인 ‘기관 없는 신체’(예컨대 알)의 개념을 뒤틀었을 뿐만 아니라(마치 맑스가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응수하여 철학의 빈곤을 써서 비판했듯이) 서론 첫 장에서부터 -들뢰즈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진정한 철학자는 카페에 앉아 “이 점에 대해 좀 논쟁합시다”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최대한 빨리 달아난다고- 들뢰즈가 논쟁을 혐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비아냥댄다. 글을 시작할 때 지젝이 외설적인 농담을 즐기긴 하지만 농담의 수위를 넘어 들뢰즈의 ‘도주선’  같은 주요 철학 개념 자체를 시작부터 맹비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전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는 라캉이 스피노자를 범신론으로 인식한 구절을 인용했다가 현대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는지 그 비판은 삭제하고,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제목으로 다들 스피노자를 추종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이런 한 철학자에 대해 날 서있는 농담이 아닌, 지젝에 대해 비판적 입문서를 쓴 이안 파커도 언급하는 지극히 ‘지젝스러운’ 농담을 통해 좀 더 지젝에 대해 알아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이 하나 있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에,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 잉크뿐이라네."      


 이안 파커는 이 농담이 헤겔적인 변증법적 반전을 통해 작용하며, 두가지 핵심적 논점이 있다고 본다. 첫째로 당신은 거부에서, 부정성에서 시작해야만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른다는 것, 둘째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반성적으로 진리 속에 포함시켜야만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농담 속 인민은 날조된 사회주의적 기쁨들에 관한 일종의 ‘허위의식’에 결코 사로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저항할 방법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 농담은 공산주의 시절 소련에만 통하는 농담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을 비롯한 선진 민주국가에서 우편물을 검열하는 기관은 적어도 ‘표면적으론’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검열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를 잘 ‘규율’ ‘관리’ ‘자기계발’하는 사회에 ‘자발적으로’ 살고 있다. 물론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이 모든 게 스피노자와 들뢰즈 때문이다 처럼 말하는 것은 독일 나치의 악행은 다 니체와 하이데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당할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에서 지젝의 결론은, 꼭 하고 싶은 지젝의 최종적 주장은 무엇일까?     


-‘과잉’동일화의 두려움은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특징이다. 적은 분산된 복수적인 주체-위치들에 대해 온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과잉동일화’하는 ‘광신자’이다. 요컨대 ‘본질주의’와 ‘고정된 정체성들’에 초점을 맞춘 의기양양한 ‘탈구축주의적’언쟁은 허수아비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후근대Post modern 이론이 환호했던 분산된 복수적인 구성된 주체(예컨대, 특수하고 비일관적인 향유 양태들을 보여주는 주체)는, 여하한 유형의 전복적 잠재력을 내포하기는커녕, 단지 후기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주체성 형식을 지칭할 뿐이다. -415p


-군복무중에 고참의 명령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 불가능한 선택의 논리는 바로 ‘화용론적 역설’의 논리, 자기모순적인 수행문의 논리이다. 적절하게 기능하기 위해서 권력 담화는 내속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야 하며, 수행적으로 “속여야” 하며, 그 자체의 기저에 있는 수행적 제스처를 부인해야 한다. 따라서 이따금씩 권력 담화와 대결할 때 진정으로 전복적인 유일한 행위는 단지 그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가오는 생태 위기의 여태까지 과소평가된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충격은 바로 ‘큰타자의 몰락’을 우리 일상 경험의 일부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며, 권력의 “큰타자”에 대한 이 무의식적 믿음을 와해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  어쩌면 우리의 물리적 생존 그 자체가 “타자의 비존재”를 완전하게 떠맡는 행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행위를 성취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453p


 의외로 지젝의 결론,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거나 동일임금 동일노동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마치 대자타는 몰락한 것처럼 과잉동일화하는 부정성의 제스처를,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나은 실패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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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의 정치철학에세이 2의 한글 두페이지짜리 글에서 두장을 추가한 글이다. 올 2월에 정치철학 공개세미나를 위해서 썼던 글이었는데, 글이 후반부로 올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운 용어가 많아 불친절해졌다. 이를 반성하며 향후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편이 끝나면 그 다음으론 헤겔과 라캉을 소개하고 활용하는 지젝의 철학에 대해서 천천히 읽고 나의 각주를 달면서 해석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내일부터는 다시 하루는 니체 두쪽읽기를  하루는 회상일기를 올릴 예정이다. 매일매일쓰기의 첫 목표인 30일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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