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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25.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5- 삼국지 창천항로 유비

인문학 두쪽읽기 190625

니체 전집 한국 번역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수 인용 필사함.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세 변화에 대하여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더 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침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나타난다. 여기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저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그리고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가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 고 말한다. ...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어 있다. 창조된 일체의 가치, 내가 바로 그것이다. 진정 ‘나는 하고자 한다’는 요구는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다” 용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이여, 무엇 때문에 정신에게 사자가 필요한가? 짐을 질 수 있는, 단념하는 마음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짐승이 되는 것만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 쟁취, 그것은 짐을 무던히도 지는 그리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는 정신에게는 더없이 대단한 소득이 된다. 진정 그에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강탈이며 강탈하는 짐승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신도 한때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더없이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더없이 신성한 것에서조차 미망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아이는 해낼 수 있는 것이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아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노라.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머리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은 층계를 오르는 일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인간에서 위버멘쉬로 한 번에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듯 하나씩 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1부의 첫 단락이 이렇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은, 하루빨리 위버멘쉬가 되고자 하는 성질급한 사람들에게 좀더 천천히 느릿힌 템포로 걸어오라고 니체가 타이르듯이 말하는 것만 같다. 니체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계들로 가득한 존재니까.


 니체는 이 차라투스트라 1부 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적인 묘사와 상징들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처음 읽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낙타 사자 용 어린아이?? 니체는 철학자라고 들었는데 왜이렇게 시적인 상징들을 쓰는걸까? 나는 이 글에서 니체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니체가 쓰는 상징이 아닌 한국인에게 훨씬 익숙한 동양의 고전인 삼국지. 그 중 에서도 삼국지연의를 만화로 재해석한 킹곤타의 작품 창천항로를 예시로 써보고자 한다. 당연히 창천항로와 삼국지에 대한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만화를 볼 예정이 있으신 분은 만화부터 감상하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첫째로 니체는 짐을 지는 낙타에 대해서 말한다. 니체의 일관된 철학적 상대가 기독교와 플라톤주의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너희들을 쉬게 하리라" 같은 성경의 구절과 떼어내서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또한 러디어드 키플링이 식민지배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고 비판받은 '백인의 짐' 같은 시가 생각나기도 하는 부분이다. 식민지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미개하기에 그들을 계몽시키고 문명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백인들의 사명이고 평생의 짐이라는 키플링의 시. 니체조차도 안타깝지만 19세기 서양 백인 남성으로서의 한계는 명확했던 모양이다. 이런 삶의 짐을 짊어지는 정신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백인적인, 너무나 백인적인 니체 사상의 한계점 중 하나일 것이다.



 창천항로 만화에서 이런 인물을 살펴보자면 당연코 초반부의 유비가 해당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주인공인 조조야밀로 위버멘쉬에 가까운, 스스로 환관 자손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난세에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한 영웅 아닌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말 또한 옳으니, 조조는 사실상 창천항로에서 어린시절부터 스스로 천하인을 자청하며 완성된 인물이다. 반면 유비는 초반부에 탁군이라는 깡촌의 골목대장에 불과하며, 도겸에게 서주를 받은 다음에도 여포에게 바보처럼 서주성을 빼앗기고 소패성에서 먹을 것이 없어 자신의 백마마저도 잡아먹기도 한다. 한실 부흥이라는 거대한 짐을 지고서 난세의 사막을 건너려고 하지만, 능력도 세력도 없어서 툭하면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인물이 창천항로 초반부의 유비이다. 조조에겐 이런 부분이 없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하며 적벽대전에 와서야 큰 패배를 맞이하고 좌절을 겪는다. 이런 부분 때문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유비가 시대가 이천년이 지나도록 냉혹한 조조와 비교되며 대중적으로 오래 사랑받은 것이 아닐까.


 이후 낙타에서 사자로 변할 때, 너는 해야만 한다 라는 의무론적 명령을 내리는 용을 만난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어 있고 너는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이 용에 맞서기 위해서는,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수 있는 사자의 정신이 필수적이다.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란 불가능하다고 니체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부친 살해' 와 같은 문화적 전통과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허나 기존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한다고 해서 새로운 가치가 자동적으로 창조되지는 않는다. 니체가 보기에 정신 자체의 부정성을 강조하는 헤겔같은 변증법의 철학은 사자의 정신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또한 헤겔과 그 제자들의 입장에서 참으로 억울하고 헤겔은 그렇게 단순한 부정의 철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수만가지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 이 또한 겨우 이 짧은 글에서 결론내리기엔 나의 역량으론 힘겨운 일이기에, 이런 논점이 있다 정도로 생각하고 천천히 다시 걸어보자.



 유비의 사례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서주를 잃고 조조의 아래로 들어가서 객장 생활을 하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는 난세의 수도 허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역적 조조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는다. 황제의 어명, 이 절대적인 명령을 받고 유비는 몇날 며칠을 고민하지만 결국엔 사실상 황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서주를 다시 되찾는다. 유럽 사회가 로마제국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선포한 이래 기독교가 해야만 한다 라는 의무론으로 유럽의 정신을 지배했듯이, 중국 한나라는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황제는 신의 아들, 천자로 불리며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해왔다. 그런 황제의 명령을 부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조조와 싸우는 유비는 실로 니체가 말한 사자의 정신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중 마지막으로 니체는 어린아이를 말한다. 그런데 낙타와 사자에서 왜 어린아이일까? 머리말에서 니체는 인간이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밧줄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낙타와 사자는 짐승이고 어린아이는 정신의 마지막 단계로 위버멘쉬에 해당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실상 짐승의 정신 단계인 것이고 차라투스트라 자신마저도 아직 위버멘쉬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사자처럼 자유를 쟁취해야 하나, 자유만으론 부족하다. 어린아이처럼 바다의 파도에 모래집이 망가지더라도 끝없이 망각하고서 다시 놀고자 하는 신성한 긍정의 정신만이 가치의 창조가 가능하다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창천항로에서 이런 사자에서 어린아이로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사례는 역시 조조의 대군이 쳐들어올때  신야에서 강하로 피난길을 떠나는 중에서 일어난 유비의 각성일 것이다. 역적 조조에 대항한다는 깃발을 올리고서 사자처럼 조조와 싸워보지만 본격적인 조조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유비는 자신을 따르는 수십만 민중들과 함께 피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친구, 수하들은 유비를 조롱하듯이 유비 당신만 죽으면 사실 천하를 위해서 가장 좋은게 아니겠냐고, 가장 빠르게 천하 백성들이 안정되고 평안해지는 길 아니겠냐고 말하자 유비는 혼란에 빠진다. 허나 결국 자신의 주머니, 자기라는 내면의 심연을 처음으로 들여다 본 유비는 더이상 하나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 자체를 셋으로 나눌수 있다는 자신의 철학, 단순히 반 조조가 아닌 자기의 가치를 역설하고 조조군에게도 공표한다. 천하는 주어진 하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서있는 곳이 바로 천하라고 외친 것이다. 이 유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표정으로 빛난다. 그리고 이 오십세가 다 된 유비가 관우 장비를 처음으로 만나서 쾌락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그것은 바로 천하 만민들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스무살 유비와 겹쳐진다. 이 유비는 니체의 낙타와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에 매우 가까워진 존재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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