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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29.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7-신체.경멸.알리타의 총몽

두쪽읽기 190629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니체 전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번역판에서 다수 인용 필사함.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51-54p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깨어난 자, 달은 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 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자아Ich” 운운하고는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자아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너의 신체와 그 신체의 커다란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커다란 이성, 그것은 자아 운운하는 대신에 그 자아를 실행한다.

감각이 감지하고 정신이 깨치고 있는 것들은 결코 그 안에 자신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감각과 정신은 너를 설득하여 저들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의 목적임을 믿도록 설득하려 든다. 이처럼 허황된 것이 저들이다.

감각과 정신은 한낱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기das Selbst라는 것이 버티고 있다. 이 자기가 감각의 눈을 도구로 하여 탐색하며 역시 정신의 귀를 도구로 하여 경청하는 것이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며 파괴한다. 이 자기가 지배하는 바,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형제여,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자기가 그것이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자기인 것이다.

너의 신체 속에는 너의 최고의 지혜 속에서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 너의 신체가 무엇을 위해 너의 최고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지를 누가 알 것인가?

너의 자기는 너의 자아를, 그리고 자아의 그 잘난 도약을 비웃는다. “이들 생각의 도약과 비상이라는 것이 다 무엇이란 말이냐?” 자기는 자신에게 말한다. “고작 내 목적에 이르는 애움길 정도가 아닌가. 나야말로 자아를 끌고가는 줄이요, 자아의 개념들을 넌지시 일러주는 자렷다.”

자기가 자아에게 명한다. “자, 마음의 고통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괴로워하며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면할 수 있을까 궁리해본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자아는 머리를 써야 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명한다. “자, 쾌감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기뻐하며, 앞으로 얼마나 자주 기뻐하게 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자아는 머리를 써야 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내 한마디 하련다. 저들의 경멸도 실은 저들의 존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그러면 저 존경과 경멸, 가치와 의지를 창조한 것은 무엇이지?

창조하는 자, 저 자기가 존경과 경멸을, 쾌감과 슬픔이란 것을 창조했다. 창조하는 신체가 자신의 의지가 부릴 손 하나로서 정신이란 것을 창조한 것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가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너희가 하는 경멸에서조차 이렇듯 너희의 자기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들의 자기, 그가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생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소망해온 것, 곧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는 것, 그것을 더 이상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며 그의 전 열망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 때문에 너희들의 자기는 몰락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의 자기는 몰락하고자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너희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너희로서는 이제 더 이상 너희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생과 이 대지에 화가 나 있는 것이다. 너희들 경멸의 사팔뜨기 눈길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시샘이 도사리고 있구나.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나 너희가 가고 있는 그 길을 가지 않으련다! 내게 너희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교량이 되지 못하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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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 배후세계를 신봉하는 자들에 대해서 니체가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과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첫 문장부터 니체는 그렇게나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즉시 그 신체를 떠나면 된다고, 즉 요즘 말로는 그따위로 자기 몸을 저주하면서 살 바에야 너에겐 자살을 추천한다고 엄청난 폭탄을 던져버린다. 다른 에서 니체는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라고 스스로를 비유했는데, 실로 이런 자기비유에 어울리는 대목이 아닐까.


 게다가 니체는 흔히 플라톤 이래로 이성이 신체를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통념을 직설적으로 거부하며, 오히려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고, 이성은 신체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감각과 이성은 둘 다 신체의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이는 하나의 새로운 발상이자 혁명적인 사유의 가능성으로만 끝났다. 허나 뇌과학이 발전하고 있는 21세기에 이는 점점 더 실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단순히 뇌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뇌는 온 몸의 신경계통과 연결된 유기체 중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사실상 신체 전체를 통해서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니체의 철학, 신체야말로 머리의 이성보다 커다란 이성이라는 사유는, 얼마전 제임스 카메론에 의해서 배틀엔젤 알리타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SF만화의 명작인 총몽에 스며들어 있는 핵심적인 철학이다. 여기서부터는 늘 그렇듯 당연히 총몽 만화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총몽 1권 2권을 보고 오시길 권한다. 어제 리뷰한 망작 영화 다크피닉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총몽은 이미 만화계의 고전으로, 시간 투자를 하셔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 총몽에서 이드에 의해 구조된 주인공 갈리(알리타)가 사실상 처음으로 만나는 빌런라 볼 수 있는, 마치 마약 중독처럼 뇌수의 엔돌핀에 중독된 마카쿠는 대놓고 니체를 인용하면서 다음의 대사를 이드와 갈리에게 던진다.



그렇다. 신체와 영혼, 또는 신체와 정신이라고 부르든, 그런 이원론에 니체와 빌런 마카쿠는 직설적으로 반대한다. 오히려 니체가 위버멘쉬로 보는 어린아이처럼 신체야말로 영혼이라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머리에 있다고 믿는 이성은 그저 신체라는 큰 이성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실제로 우리는 몸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며, 열살 초등학생 신체일때의 내 정신과 스무살이 넘은 신체의 정신은 엄연히 다른 존재가 아닐까? 나이를 통한 차이가 아니더라도, 이는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닐까. 이미 성장이 끝난 스무살 이후에, 80킬로의 신체에서 20킬로가 빠진 60킬로의 신체는, 그 부속물인 정신도 당연히 달라진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듯 가볍게 춤을 추기에 적합한 정신이 되는 것이다.


 위의 두 장면에서 갈리의 뇌는 그대로이지만, 전형적인 여성스러운 예쁜 손과 바퀴 다리를 달았을 때와, 전투와 살인에 적합한 광전사의 몸을 달았을 때 갈리는 같지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빌런 마카쿠는 안타깝게도 갈리의 경우와는 다르다. 갈리에겐 그를 보살펴주고 함께 싸워주는 친구이자 길동무 이드의 존재가 있었지만, 마카쿠는 하수구에 태어나면서부터 버려진 존재로 공포와 고통에 매몰되어 버렸다.  시리즈에서도 다룬 라투스트라 1부의 신의 세 단계 변화에서 말하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 단계. 마카쿠는 낙타로서 너무나 많은 삶이라는 짐과 고통을 견디다가 사자와 어린아이로 건너가지 못한 존재인 것이다.

 니체가 그토록 비판한 르상티망, 원한의식에 사로잡힌 안타까운 존재가 바로 마카쿠인 것이다. 타인을 자기가 당했던 공포와 고통 속으로 끌어내리려는 저열한 정신. 이는 니체 철학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항상 반복되는 것이며, 이런 저열한 정신에 대해서 갈리는 비웃으면서 답변해준다. 마카쿠와 대비되는, 이런 춤추며 날아갈듯한 갈리의 정신과 신체는 스스로를 극복하여 위버멘쉬를 지향하는 차라투스트라와 매우 닮아있다. 앞으로도 총몽은 이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 시리즈에서 자주 인용될 예정이니 오늘은 이정도로 줄이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강조한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쓰레기라고 불릴 만한 인간들을 종종 만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니체와 갈리가 말하듯, 타인의 불행이 아니면 행복을 느끼질 못하는 쓰레기를 일일히 상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비웃어버리고 진짜 나를 전사로 만들어줄 적수를 찾아가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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