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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n 30. 2019

정치철학 에세이3 알리타 라캉의 거울 유튜브

정치철학 에세이 3 190224 홍대동 반백수

배틀엔젤-알리타의 거울과 프로이트-라캉의 거울과 유튜브. 정치철학 에세이3 20190224

-홍대동 반백수 LSH

 

-난 이드의 인형이 아니야!-

만화 총몽1화에서 얌전한 여자애로 살기를 원하는 이드를 거부하는 갈리(알리타)의 대사.




 

영화에 대해 리뷰해보기 전에 먼저 ‘스포일러’라는 것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라는 희대의 스포일러는 이제 아무도 스포일러라고 여기지 않는 일종의 클리셰, 밈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오히려 대체 절름발이가 범인인 영화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궁금해서라도 그 영화를 관람하는 나같은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신작의 경우에 누군가가 중요한 반전을 댓글같은 곳에서 말해버려서 의도치 않게 알게되면 나같은 경우에도 먼저 짜증부터 치미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치 않게 보일 수도 있는’ 댓글이 아닌 영화나 만화에 대해 쓰는 에세이는 당연히 세부 내용, 스포일러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아니, 리뷰=스포 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이는 내 글뿐만이 아니라 모든 리뷰성 글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새로운 문화 문물을 접하기 전에 최대한 검색이나 인터넷을 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영화 아바타의 대흥행 이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총몽’ 만화를 실사로 제작하겠다고 한지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각본은 당연히 상당부분 각색이 이루어졌는데 알리타가 처음 의식을 찾고 거울을 쳐다보며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을 인식하는 씬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른바 ‘거울 단계’에 대해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언제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의식하게 될까. 라캉은 이에 대해 아기가 거울을 쳐다보면서 몸을 움직이다보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한다는 ‘상상’에 대해서 중요시하게 여긴다. 하지만 거울에 보이는 자기 몸은 좌우가 반전된, ‘오인’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인된 이미지이지만 인간은 거울을 통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거울 단계’를 거쳐서 인간의 ‘자기 의식’이 만들어진다고 라캉은 강조한다.

그후 아기는 점차 부모의 언어를 모방하여 언어를 배우게 되고 특히 언어중에서도 ‘금지’의 언어를 매우 강렬하게 인식한다. 그 이유는 당연히 아기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약하고 장난감을 먹거나 위험한 장소로 가는등 자신을 해치는 행동을 하기 쉽기에 부모가 계속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라캉이 볼 때 인간은 이렇게 이미지들의 ‘상상’의 세계에서 언어를 배워서 ‘상징’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도 상당부분 다루었고 이 글에서도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여담으로 프랑스에서는 최근에 부모 라는 언어가 양쪽 성을 전제한다고 생각해서 ‘보호자’등의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경우엔 ‘양친’이 있긴 하나 ‘양성’을 떠올리기 쉽기에 역시 새로운 언어, 발명이 필요한걸까?)

그러면 단순한 의문도 당연히 제기될 수 있다. 거울이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은 자기 의식이 없던 거냐고.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거울이 없던 시절에는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호수같은 수면에 자기의 얼굴을 확인했을 것이고, 하다못해 만화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연출처럼 타인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확인하거나, 타인이 자신은 어떻게 생겼는지 이렇다 저렇다 묘사하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과정속에 ‘오인’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잠깐, 21세기의 아기들은... 거울보다 유튜브를 많이 본다면?



이드는 갈리를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육아는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고 청소나 빨래등 다른 가사노동은 기계의 힘으로 상당부분 자동화되고 간편화되었음에도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일은 쉽게 외주화하거나 대체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상대방이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나 노약자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좀처럼 무언가에 집중하기 힘들고 툭하면 이것저것 해달라 떼를 쓰는 아기에게 일종의 ‘특효약’이 발명되었으니 그것은 유튜브의 무한히 연속되는 영상이다. 주의가 산만한 아기도 유튜브의 아기전문 영상물을 계속 보는 동안에는 울거나 떼쓰는 것 없이 조용히 영상을 계속 본다. 이는 주부 커뮤니티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것으로 공유되어 나같이 육아와는 거리가 먼 사람조차 알게된 정보, 생활 꿀팁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기용 영상 또는 아동용 영상들은 아기가 끊임없이 “따라하는” “모방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주요 특징이다. 그리고 아기가 주의를 놓치지 않도록 쉽고 반복적이고 자극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물론 티비가 주요 매체이던 시절과, 아기에게 아침마다 뽀뽀뽀를 보여주던 시절과 한결같다. 다만 유투브 시대에 달라진 것은 아기가 어느 영상을 볼지 끝없이 터치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뽀뽀뽀는 엠비씨의 티비 편성표에 따라 항상 시작과 끝나는 시간이 아침 7시부터 7시 반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유투브는 그런 것이 없다. 아무리 영상을 쉬지도 않고 빠르게 소비해도 수많은 유투브 제작자들이 비슷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빠르고 엄청나게 많다.


필자가 좋아하는 고양이 영상도 유튜브에 엄청나게 많다




어쩌면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보다 유튜브를 통해서 타인에 대해 의식하고 그것을 모방하며 배우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21세기의 아이들은, 라캉이 상정한 ‘거울 단계’를 통해 인식하는 ‘자기 의식’과 굉장히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그러한 거울을 통해 인식하는 ‘주체’라는 것은 라캉이 강조하는 분열된 주체이건 뭐건 간에 결국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기껏해야 데카르트적인 근대적 주체의 틀 속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는 근대적인 주체라는 개념이  미래로 갈수록 점점 더 우스워지는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유튜브를 통해 학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위닝을 하다가 박지성을 탓하는 박지성




 

마찬가지로 과거의 아기들, 과거의 주체들에 대해서도 반추해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흐르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굴 수는 없다‘는 헤라이클레토스의 격언처럼 사실 물은 항상 흐르고 있는 것이고 그런 수면을 통해 확인하는 자신의 인상은 항상 흔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없다고, 폭력적이고 백인 남성 중심적인 근대의 잔재들을 다 거부하자고 하는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여겨지는 의견에 내가 전적으로 동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기반 위에 서있는 ’주체‘라는 환상은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다르게 돌아가는데도 자꾸만 돌아온다. 마치 프로이트가 강조한 ’억압된 것의 뒤틀린 회귀‘ 반복강박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같은 경우에는 그의 주저 ’세계사의 구조‘에서 이를 칸트로부터 출발하여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연결지어 사유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부정할 지라도 코뮤니즘, 공산주의는 무의식 차원에서 억압된 것이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칸트의 말을 빌려서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확신하고 성찰하는 주체‘라는 이념도 바로 그러한 것, 의식에서 거부하더라도 무의식 차원에서 끝없이 회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21세기에도 다시 한번 근대의 시작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칸트를 읽어야 하는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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