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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03.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9 전쟁 전사 사이보그 갈리-알리타

두쪽읽기 190703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니체 전집 번역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다수 인용 및 필사함.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75-78p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적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선처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하라!


전쟁에 나가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 너희를 마음속 깊이 사랑한다. 나 예나 지금이나 너희와 같은 부류의 존재다. 너희 최상의 적이기도 하고, 그러니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하라!


나는 너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증오와 시샘을 알고 있다. 아직 너희는 증오와 시샘의 감정을 모를 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때문에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만큼은 위대해 있도록 하라!


만약 너희가 깨닫는 일에서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위한 전사는 되어야 할 것이다. 전사야말로 그같은 신성의 길동무이자, 선구자이니.


나 수많은 군졸들을 보고 있다. 나 많은 전사가 보고 싶구나! 저들이 걸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유니-폼”이라고 부르지. 그러나 저들이 그 속에 감추고 있는 것만은 그래도 유니-폼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희는 자나깨나 적을, 너희에게 걸맞은 적을 추적하는 눈을 갖고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는 첫눈에 적의를 느끼는 자들이 몇몇 있기는 하다.


너희는 너희에게 걸맞은 적을 찾아내어 일전을 벌여야 한다. 너희의 생각들을 위해! 설혹 너희의 생각이 패배하더라도 너희의 정직성만은 그에 굴하지 않고 승리의 함성을 외쳐야 하리라!


너희는 평화를 새로운 전쟁을 위한 방편으로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긴 평화보다 짧은 평화를 더 사랑해야 한다.


나 너희에게 노동이 아니라 전투를 권하는 바이다.


 나 너희에게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권하는 바이다.


 너희가 하는 노동이 전투가 되고 너희가 누리는 평화가 승리가 되기를!


사람들은 활과 화살을 지니고 있을 때에만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다를 떨고 다투게 된다. 너희가 누리는 평화가 곧 승리가 되기를!


너희는, 전쟁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훌륭한 명분이라고 말하려는가? 나 너희에게 말하련다. 모든 명분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훌륭한 전쟁이라고.


이웃사랑이라는 것보다는 전쟁과 용기가 위대한 일을 더 많이 해왔다. 지금까지 불운에 처한 자들을 구해낸 것도 너희의 연민의 정이 아니라 너희의 용맹이었다.


무엇이 좋은 것이냐? 너희는 묻는다. 용맹해 있는 것이 좋은 것이지. 어린 소녀들에게나 말하도록 하라. “좋은 것이란 아리따운 동시에 감동적인 것” 이라고.


사람들은 너희를 가리켜 무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은 순수하다. 그리고 나 너희가 정감을 드러낼 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좋아한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밀물을 부끄러워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썰물을 부끄러워한다.


너희가 추악하다고? 좋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추악한 자들이 걸치는 외투인 고매함이라는 것을 몸에 걸치도록 하라!
너희 영혼이 커지면 오만해지고, 그렇게 되면 너희 고매함 속에 악의가 깃들게 된다. 나 너희를 알고 있다.


악의에 있어서는 오만한 자와 허약한 자가 하나가 된다. 그런데도 저들은 서로를 몰라본다. 나 너희를 알고 있다.


적을 갖되, 경멸스런 적이 아니라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 너희는 너희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의 적의 성공이 곧 너희의 성공이 될 것이다.


반항, 노예에 있어서는 그것이 고상한 일이 된다. 너희에게 있어 고상한 일은 복종이기를! 그리고 너희가 내리는 명령 그 자체가 일종의 복종이어야 한다!


뛰어난 전사에게는 “너는 해야 한다”는 말이 “나는 하고자 한다”는 말보다 듣기 좋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마음에 드는 것 모두가 먼저 너희에게 명령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너희의 최고 희망에 대한 사랑이기를, 그리고 너희의 최고의 희망이 생에 있어서 최고의 이념이기를!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최고의 이념을 명하도록 하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 말이다.


이처럼 복종하는 생, 그리고 전쟁과 함께하는 생을 살도록 하라! 오랜 생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 어떤 전사가 선처받기를 원하랴!


나 너희를 선처하지 않노라, 나 너희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노라.


전쟁에 나가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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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와 그의 철학에 대한 최악의 오명 중 하나는 니체가 독일 나치의 철학적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세계 2차 대전을 낳은 인종차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 사상가가 바로 니체가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 전쟁과 전사에 대한 의 몇몇 구절을 보자면 그런 오명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닌것도 같다. 니체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정말로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찬양하는 것일까?


 이 니체를 읽는 시리즈에서 내내 강조하듯이, 우리는 약탈하는 군인같이 자기가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나머지는 내다버리는 나쁜 독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니체가 복종하는 생, 전쟁과 함께하는 생을 말하지만 대체 무엇에 복종하라는 것인지에 주목해야만 한다. 혹시나 독자들이 헷갈릴까 싶어 차라투스트라는 친절히 말해준다. 너희가 복종해야 할 최고의 이념은 바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 즉 인간은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를 창조하려면, 1부의 첫 장인 낙타 사자 어린아이라는 정신의 세 변화에서 말한 것처럼 기존의 가치에 대한 거부와 투쟁이 필수적이다. 복종해야 할만한 가치는 단 하나.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 위버멘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전사의 철학을 온몸을 통해서 표현하고 실천하는 존재로 나는 만화 총몽의 주인공 갈리(영문판과 영화판 이름은 알리타) 이상의 캐릭터를 알지 못한다.


 갈리는 고철 폐기장에서 이드에 의해 구조되어 갈리라는 이름을 받았다.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라는 철학적 고민에 대해서 갈리라는 이름도 가짜에 불과하고 신체는 거의 기계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교환가능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중에 자신이 자신인 단 하나의 증거는 몸으로 익혀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고대 화성의 무술인 기갑술 하나밖에 없고, 이 잃어버린 기갑술을 다시 기억해내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오로지 전투만이 그리고 강해지는 것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는 것이다.


갈리의 마음속 최강의 상대이자 우상 저슈건.


이 이야기를 그저 미래의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나 잠깐 니체에서 이야기를 틀어서 마르크스 할배의 이야기를 빌려와보자. 마르크스가 종종 영국인 대상으로 독일 사례를 말하면 영국인들이 아으 독일은 후진적이야 미개해 하고 반응하곤 했지만, 마르크스는 그럴 때마다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우리 21세기를 사는 인류는 19세기 맑스 니체가 살던 시대의 인류와 같은 인류일까? 의학과 공공위생의 발전으로 아기 때부터 온갖 면역주사와 항생제를 기본으로 투여받은 것이 지금 21세기의 문명인이다.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화학적 작용을 더했을 뿐인 유기체, 따뜻한 생명체니까 다른 걸까? 그러면 기계와 생명은 어떤 근본적 차이가 있을까?


갈리의 우상 모터볼챔피언 저슈건과 그의 스승


오히려 생명, 유기체는 그저 아직 분석하지 못한 정교하지만 불완전한 분자 기계라 생각할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현대 문명인들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없이는 생활이 유지되지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는 없어도 생활이 가능하지만 스마트폰이 고장나거나 없으면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저 신체의 외부에 있다고 해서 우리는 사이보그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사상이 말하듯이 21세기 우리 인류는 이미 기존 인류와 단절된 포스트 휴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19세기보다 훨씬 경쟁이 격화되고, 전쟁이나 다름없는 21세기의 취업경쟁 속에서 우리는 사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전쟁이고, 인간은 싸움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난 전투가 너무 좋아! 이 몸이 기계가 아니라 진짜 내 일부가 되는 그 순간이 말이야! 피가 들끊는다는거지! 머리속이 새하얗게 재가 되서 도저히 생각따윈 떠오르질 않게 되거든"-갈리


"난 싸움이 하루 세끼 밥보다도 좋지만, 전쟁은 증오해! 그리고 전쟁을 즐기는 자도"-퍼기어


갈리는 우연히 만난 퍼기어라는 캐릭터와 싸움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니체가 말하는 길동무가 되고, 둘이서 사막을 건너다가 죽을 고비를 넘겨 연인이 된다. 그런데 퍼기어는 싸움을 좋아하지만 전쟁은 증오한다고 말한다. 퍼기어와 니체는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것일까? 이런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칼 폴라니라는 사회적 경제의 시조로 추앙받는 경제학자는 "거대한 전환" 책에서 19세기 유럽의 특징 중 하나로 백년 평화를 말한 바 있다. 18세기나 20세기와는 다르게 19세기에는 적어도 유럽 안에서 2년 이상 길어지는 큰 전쟁이 없었던 것이다. 니체는 바로 그런 시기에 유럽에서 살았고, 어렸을 때부터 몸도 약해서 전쟁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군인으로 참전했을 가능성은 희박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마치 전쟁을 모르는 전후 일본의 일부 젊은이들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전쟁이 가능한 정상 국가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처럼, 전쟁을 잘 모르는 니체도 쇠약해지고 퇴락하는 말세인들, 유럽인들을 보다 못해서 노동보다 전쟁을 권한다고 다소 쉽게 말한 부분이 아닐까-라고 나는 체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전투는 좋아하지만 전쟁을 싫어하는 퍼기어야말로 니체보다 니체의 사상을 더 잘 알고 실천하는 철학자라는 역설도 가능하지 않겠는가?이런 면은 다음에 다룰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장을 읽으면 더욱 드러날 것이다.


갈리와 퍼기어를 살기위해 배신한 약자 요르그...


이런 비판적 관점이 아니라 니체를 옹호하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전투는 작은 규모의 인원간의 싸움이고 전쟁은 다수가 부딪치는 싸움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전사들에게 결국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 적을, 훌륭한 적수를 만나고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가 아니라 굳이 전쟁을 권했다는 것은 이 싸움이 단순히 개개인끼리의 작은 전투만으로 끝날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규모의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니체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을 극복하여 위버멘쉬가 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분명 아무나 가능한 쉬운 과업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혼자서 다 해낼 만큼 쉬운 과업도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도 길동무를 찾고 니체는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철학 역사상에서 스피노자를 자신의 벗이라고 칭한것이 아닐까.


총몽 갈리의 수많은 길동무들.



이 전쟁과 전사에 대한 장에 대해 다소 과감할 수 있는 두 가지 해석을 해보았지만, 둘 중에 누가 정답이고 누가 오답이고 하는 것은 아마 니체의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춤추고 노래하고 싸우는 것이 아닐까. 다음 글에서는 니체의 주요 적수 중 하나인 새로운 우상에 대해서 다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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