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09.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2 여인 진리 매드맥스 퓨리오사

두쪽읽기 늙은 여인네들과 젊은 여인네들에 대하여

늙은 여인네들과 젊은 여인네들에 대하여 108p-111p

"차라투스트라여, 어찌 그리 조심스레 어스름 속을 걷고 있는 것이지? 외투 속에 그리도 정성스레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고?
선물로 받은 보물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그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가? 그대, 사악한 자의 벗이여, 그것도 아니라면 그대 스스로 도둑의 길에 들어서라기라도 한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 진정, 형제여! 그것은 내가 선물로 받은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지.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


오늘 해 질 녁,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늙은 여인네가 다가와서는 나의 영혼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여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지. 정작 여인에 대해서는 한번도 말해준 것이 없지만.”


나는 그 늙은 여인네에게 대꾸했다. “여인에 대해서라면 사내들에게나 이야기할 일이지.”
“내게도 여인 이야기 좀 해주게나. 나 너무 늙어 듣자마자 잊고 말터이니.” 여인네가 말했다.
나는 늙은 여인네의 청을 들어 이렇게 말했다.


“여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란 것이 그것이다.


여인에게 사내는 일종의 수단이다. 목적은 언제나 아이다. 그렇다면 사내에 있어서 여인은 무엇이지?
진정한 사내는 두 가지를 원한다. 모험과 놀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놀잇감으로 여인을 원하는 것이다.


사내는 전쟁을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너무나도 달콤한 열매를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전사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쓴맛을 내기 마련이니.


사내보다는 여인이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한다. 그러나 여인보다 더 아이다운 것은 사내다.
진정한 사내 내면에는 아이들이 숨어있다. 그 아이는 놀이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여인들이여, 사내 안에 숨어있는 아이를 찾아내도록 하라!
여인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여러 덕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순수하고 우아한 놀잇감이 되어야 한다.


별의 광채가 너희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나 위버멘쉬를 낳고 싶다!’ 이것이 너희의 희망이 되기를.


너희 사랑 속에 용기가 깃들어 있기를! 너희는 사랑으로 무장, 너희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있는 자에게 돌진해야 하리라!


너희의 사랑 속에 너희의 명예가 깃들어 있기를! 그렇지 않을 경우, 여인은 명예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받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할 일이며, 결코 둘째가 되지 말 일이다. 이것이 너희의 명예가 되도록 하라.


여인이 사랑을 할 때, 사내는 여인을 두려워할 일이다. 여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그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여인이 미워할 때, 사내는 여인을 두려워할 일이다. 사내는 그 영혼의 바탕에서 사악할 뿐이지만 여인은 그 바탕에서 열악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지? 쉬붙이가 자석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나 너를 더없이 미워한다. 너는 잡아당기긴 하면서도 놓치지 않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보라, 방금 세계가 완전해졌으니!’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복종할 때 여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여인은 복종해야 하며, 그 자신의 표면을 위해 어떤 깊이를 찾아내야 한다. 표면은 여인의 정서, 일종의 얕은 물 위에서 요동치는 격한 살갗이다.


이와 달리 사내의 심정은 깊다. 그리하여 그의 강물은 지하의 동굴 속으로 솨솨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여인은 이러한 사내의 힘을 짐작은 하겠지만 이해는 하지 못한다.“


이쯤에서 그 늙은 여인네가 내게 대꾸했다. “차라투스트라가 좋은 것을 많이 이야기해주었구나. 누구보다도 그런 말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


기이한 노릇이다.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인데 여인들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옳으니! 그것은, 여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자, 감사의 표시로 이 작은 진리를 받게나! 그 진리를 터득하고 있을 만큼은 나 늙어 있으니!
그것을 천으로 감싸게, 그 입을 막고, 그렇지 않으면 그는 너무도 요란하게 소리치게 될 터이니.“


“여인이여, 내게 그대의 작은 진리를 다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 늙은 여인네가 말했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채찍을 잊지 말게!”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지난번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장에서 니체가 나치나 전체주의 사상의 기반 아니었냐 라는 식의 오해와 편견 만큼이나, 이번 여인에 대한 장도 수많은 오해와 편견들 그리고 오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니체에 대한 평가들을 낳아 왔다. 특히 마지막에 여인에게 가려면 회초리를 잊지 말라는 구절은, 마치 이름을 말하기도 꺼려지는 ㅇㅂ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함부로 말하는 ㅅㅇㅎ 같은 혐오 표현들의 조상격이 아닌가 라고 비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니체는 정말이지 안티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지금 보기엔 시대착오적인 사상가에 불과한 것 아닌가?


허나 이 니체 읽기 시리즈의 처음부터 내내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니체를 읽을 때 자기가 읽고 싶은 부분만 빼내서 읽고 다른 맥락과 의미들은 무시하고 심지어 망가뜨려버리는, 약탈하는 군인과 같은 나쁜 독자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전 장에서도 이미 니체는 진리는 여성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독일어에서 명사에 여성형 남성형이 있고 진리라는 명사가 여성형으로 취급된다는 것에 기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허나 그렇다면 왜 그동안 칸트나 헤겔같은 다른 위대한 철학의 거인들은 진리가 여성형이라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까? 니체가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모든 가치를 전도하고자, 뒤집어놓고자 했고 그래서 새로운 관점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독특한 관점이 바로 니체 철학의 위대하고 독창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여인에게 있어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해결책이 임신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만약 이 말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임신 자체로 받아들여버리면 크나큰 오독을 저지르게 된다. 니체는 1부 첫 장의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서부터 낙타 사자 어린아이라는 위버멘쉬가 되는 단계를 말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는 갑자기 성숙한 사람이 다시 어려지는 회춘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해석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하나의 문학적 비유로, 즉 여인이 임신을 통해서 어린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창작의 고통을 산고와 비교하지 않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고통은 마치 임신의 고통과 닮아있다. 새로운 세대를 창조하고 낳으려는 고통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마지막에 여인에게 갈때 회초리를 들고 가라는 충고도, 임신을 통해 새로운 존재 위버멘쉬를 낳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창작의 고통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아니겠는가? 또한 니체에게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존재와 윤리에 대한 거부, 파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니체의 여성을 진리로 보고 기존 가치와 진리에 대해 투쟁해서 위버멘쉬를 낳는 존재에 대해 다루는 캐릭터로 나는 매드맥스의 퓨리오사 이상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저 황량한 사막같은 매드맥스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여성에다가 팔 하나가 없는 장애가 있는 몸으로 누구보다 열렬히 투쟁하는 캐릭터이다. 사실상 영화 포스터에서 나오는 것처럼 남자 주인공 맥스보다 더 중심적인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혹시 아직 보지 못한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까봐 이 내용은 따로 스포일러 에세이로 다루기로 하겠다. 영화를 좋아하는 내 친구 하나는 이렇게 평한 바 있다. 다크나이트조차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진정한 이 시대의 페미니즘 영화라고. 조만간 스포일러 에세이로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줄이기로 하자. 계속... 



니체의 노파, 늙은 여인네가 말하는 것처럼 혹시 여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1-천 개와 하나의 목표, 원피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