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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07.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1-천 개와 하나의 목표,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각자의 목표와 원피스


천 개 그리고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96-99p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나라와 많은 민족을 둘러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많은 민족들이 저마다 무엇을 선으로, 그리고 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땅에서 선과 악보다 더 막강한 힘을 보지 못했다.
먼저 평가라는 것을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족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이웃 민족이 평가하듯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


이 민족에게 선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와 모욕이 되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곳에서는 악한 것으로 불리는 많은 것들이 저곳에서는 존귀한 영예로 장식되는 것도 나 발견했고,
그 어떤 이웃도 다른 이웃을 이해한 적이 없다.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이 갖고 있는 망상과 악의를 괴이쩍게 생각했다.


저마다의 민족 위에 가치를 기록해둔 서판이 걸려 있다.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극복해낸 것들을 기록해둔 서판이니, 보라, 그것은 마다의 민족이 지닌 힘에의 의지의 음성이니.


가상히 여길 만한 것.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에게 힘겨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없어서 안 될 것과 힘겨운 것을 저마다의 민족은 선이라고 부르며, 더없는 곤경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진기하고 더없이 힘겨운 것을 신성한 것으로 기린다.


이웃 민족이 무서워 떨고 시샘할 만큼, 어떤 민족으로 하여금 지배하도록 하고 승리를 쟁취하도록 하며 영예를 누리도록 하는 것, 그와 같은 것이 그 민족에게는 숭고한 것, 으뜸가는 것, 척도, 만물의 존재의미로 간주되고 있다.


진정, 형제여, 네가 먼저 어떤 민족이 처해 있는 곤경과 땅과 하늘, 그리고 누구와 이웃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너는 그 민족이 어떻게 극복을 하는지 그 법칙과, 어떤 이유에서 그 민족이 그러한 사다리를 타고 그 자신의 희망을 향해 오르고 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으리라.


“너는 언제나 으뜸이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한다. 질투에 불타는 너의 영혼은 벗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리스인들의 영혼을 전율시킨 가르침이었던바 이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위대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말하고 활과 화살을 다루는 일에서 능할 것” 저 마음에 드는 한편 어렵기도 한 내 이름이 유래하는 바로 그 민족은 그런 일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어려운 일로 여겼다.


“어버이를 공경하고 그 영혼의 뿌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뜻을 따를 것” 또다른 민족은 이러한 극복의 서판을 머리 위에 내걸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강력한 불멸의 민족이 되었다.


“충성을 익히되 그 충성을 위해 악하며 위험스러운 일에서조차 명예와 피를 걸 것” 또다른 민족은 이런 다짐으로 자신을 제어했으며, 자신을 제어해가며 거대한 희망을 잉태, 몸이 무거워지기까지 했다.
진정,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일체의 선과 악을 부여해왔다. 진정, 그것들은 저들이 받아들인 것도, 찾아낸 것도 아니며, 천상의 음성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창조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사람”, 그러니까 “평가하는 존재“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평가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평가된 모든 사물에게는 평가 그 자체가 보물이요 보석이니.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평가라는 것이 없다면 현존재의 호두는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귀담아 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존재들이여!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니.


원래는 민족들이 창조의 주체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이 그 주체가 되었다. 진정, 개인 그 자체는 최근의 산물이다.


일찍이 민족들은 자신들 위에 선을 기록해둔 서판을 내걸었다. 지배하고자 하는 열정과 순중하고자 하는 열정이 그같은 서판을 창안해냈다.


집단에 대한 애호가 자아에 대한 애호보다 더 뿌리깊다. 그리하여 집단이 떳떳한 양심으로 불리는 동안 떳떳하지 못한 양심만이 자아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다수의 이익을 내세워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챙기려는 약삭빠르고 무정한 자아, 집단에게 이런 자아는 그 집단의 근원이 아니라 몰락을 의미한다.
선과 악을 창조한 것은 언제나 사랑을 하는 자들과 창조를 하는 자들이었다. 모든 덕을 일컫는 명칭 속에서 사랑의 불길이, 노여움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나라와 많은 민족을 둘러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땅에서 이들 사랑을 한다는 자들이 만들어낸 창조물보다 더 막강한 힘을 보지 못했다. “선” 과 “악”, 그것이 바로 그 창조물들의 이름이었다.


진정, 이런 칭찬과 질책의 힘은 괴물과 같다. 형제들이여, 말하라. 누가 나를 위해 이 괴물을 제어할 것인가? 말하라, 누가 천 개나 되는 이 짐승의 목에 쇠사슬을 채울 것인가?


지금까지 천 개나 되는 목표가 있었다. 천 개나 되는 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천 개의 목에 채울 쇠사슬이 없을 뿐이다. 단일한 목표가 없는 것이다. 인류가 아직 목표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말하라, 형제들이여, 인류가 여지껏 목표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인류라는 것 자체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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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말한다. 사람에겐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연애든 취업이든 내 집 마련이든 건물주든 재벌 2세든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라고 할 지라도 누구나 각자의 삶의 목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집합인 민족도 마찬가지다. 이 천 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장에서 니체는 각 민족마다의 목표가 다르게 설정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같이 부강한 나라에서는 호화롭게 사치를 부리는 소비가 하나의 미덕, 선으로 여겨지고 지나친 검약은 구두쇠라고 하나의 악덕처럼 비판받는다. 하지만 반대로 내전을 겪고 있는 예멘 난민같은 경우에는  사치는 악덕 그 자체이고 근검절약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절대선으로 찬양받을 것이다.


이러니 한 민족이 이웃의 다른 민족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이해는 커녕 다른 민족을 악덕을 숭배하는 집단으로 여기고 멸시, 혐오하거나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인간 마음의 어두운 면은 고대 시절부터 근대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거의 변하지 않은 것만 같다. 사실상 같은 종교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사소할 수 있는 교리 해석 차이나 생활환경상의 가치 차이로 서로를 미워하고 차별하고 억압해온 사례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지 않은가.


이렇게 민족마다 다른 가치를 선이라 말하며 추구하는 가운데 니체는 최초로 힘에의 의지를 거론한다. 이전에 니체의 위버멘쉬를 초인으로 단순하게 잘못 번역해서 빚어진 오해와 마찬가지로, 힘에의 의지는 "권력의지"로 주로 번역되어 수많은 오해를 낳는 주범이었다. 여기서 니체는 민족마다 각자의 가치를 기록해둔 서판이 있으며, 것은 각 민족들이 무엇을 극복했는지가 담겨있는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권력의지라는 기존의 번역은 권력이라는 말의 어감과 맥락상 마치 누군가를 지배하고 종속시키려는 의지로 해석될 우려가 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석되어 독일 나치에게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니체가 강조한 것은 우리가 타 민족보다 우월하니까 지배하는 가치 따위가 아니라, 각 민족들이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낸 가치와 미덕인 것이다.


 마지막에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천 개나 되는 민족이 있기에 천 개나 되는 목표가 있다면, 사실 이들 공통의 단일한 목표란게 없다면 인류라는 것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게 아니냐고. 목표가 있고 가치 평가가 있어야 창조가 가능하다면, 니체의 이 질문은 상당히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민족들의 공통의 단일한 목표를 만들어내면 여러 민족들을 통합한 인류라는 개념을 창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걸 니체가 의도하고 질문을 남겨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니체에게 이 단일한 목표는 이전의 장들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당연히 인류 모두가 자신을 극복하고 가치를 창조하려는 위버멘쉬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과업이리라. 실제 유엔이나 국제 난민보호기구,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국제적 사회단체는 이렇게 한 민족이나 국가의 편협한 시야와 한계를 극복하고 니체의 위버멘쉬적인 존재에 실질적으로 접근하는 발걸음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렇게 사람마다 각자의 목표가 있지만 동시에 공통의 목표가 있는 만화의 사례로는, 역시 오다 에이치로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만화 원피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원들은 각자의 목표가 서로 다르지만, 공동목표로 대해적 골 D 로져가 남긴 원피스는 보물을 찾아서 루피를 해적왕으로 만든다는 것은 밀짚모자 해적단  선원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다. 리고 이 해적왕은 흔히 생각하는 모두를 지배하는 왕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이전 해적왕이었던 로져도 지배에는 관심이 없다고 나오며, 루피 또한 지배가 아니라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해적왕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권력의지라는 잘못된 번역이 아닌, 자신을 극복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존재가 바로 가장 자유로운 해적왕 아닐까.



루피는 해적왕, 나미는 모든 바다의 해도 그리기, 조로는 세계 제일의 대검호, 상디는 모든 물고기가 모여 산다는 오올 블루를 찾기, 쵸파는 세상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기 등등 언뜻 보기엔 서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각자의 가치와 목표가 존재한다. 허나 이 밀짚모자 해적단 각자의 가치와 목표들이 원피스라는 거대한 비밀이자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에서 자연스레 추구된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단련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이런 든든한 동료와 함께 떠나는 모험이라면 각자의 진짜 목표가 다르더라도 공통의 목표 하나로 모아서, 아무리 어려운 난제라도 힘을 모아 해결하면서 같이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길동무를 찾듯이, 지금 시대에 한국을 사는 우리들도 그런 동료, 길동무를 사실 갈구하지 않는가? 이런 점들이 한국에도 왜색 논란에도 불구하고 원피스가 꾸준히 인기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정말로 루피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지금의 익숙한 일상의 자신에게서 떠나 모험이 필요하리라. 다시 진짜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말이다. 




P.s. 니체와 스피노자를 자신의 주요한 철학 스승으로 여기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의 후기 저서인 천개의 고원은 아마 이번 글에서 제목을 빌려온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책인데 브런치에서도 다뤄보는 날이 오기를. 다음 글에서는, 무수한 오해와 비난을 받은 니체 여성, 니체와 페미니즘에 대해서 다뤄보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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