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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11.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3-혼인 연애 늑대아이 들뢰즈

아이 혼인 연애는 어떤 가치를 낳는가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 115-118p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출판사 니체전집 중에서 발췌)

형제여, 너만을 위한 물음 하나가 있다. 다림추를 내리듯 나 네 영혼 속에서 그 물음을 내려본다. 네 영혼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아내기 위해.


너는 젊다. 그리하여 아이와 혼인을 원한다. 그러나 묻노니, 너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인간인가?
너는 무훈에 빛나는 자, 자신을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네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나 네게 묻노라.
그것이 아니라면 네 안에 짐승이 있고 절박한 요구라는 것이 있어 그같은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너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


나, 네가 거두어들인 승리와 네가 쟁취한 자유가 아이를 동경하기를 바라노라. 너 너의 승리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 살아있는 기념비를 세워야 하니.


너는 너를 뛰어넘어 세워야 한다. 그럴려면 너의 신체와 영혼이 먼저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앞을 향해서뿐만이 아니라 위를 향해서도 생식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혼인이라는 화원이 너를 돕기를 바란다!


너는 더욱 숭고한 신체를 창조해내야 한다. 최초의 운동.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를 말이다. 창조할 자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다.


혼인. 나는 당사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를 그렇게 부른다. 그와 같은 의지를 의욕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서 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나 혼인이라고 부르는 바이다.


이것이 네가 하는 혼인의 의미가 되고 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많은-너무나도-많은-자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그것을 나 어떻게 부를까?
아, 두 영혼의 이 구차함이여! 아, 두 영혼의 이 더러움이여! 아 두 영혼의 이 가엾은 자기만족이여!


이런 것 모두를 저들은 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고는 말한다. 저들의 혼인은 하늘에서 맺어진 것이라고.


좋다. 나는 하늘을, 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떠벌리고 있는 이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천상의 그물에 걸려든 이들 짐승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가 맺어준 것도 아닌데 축복을 하겠다고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신 또한 먼 곳에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혼인을 비웃지는 말라! 어버이로 인하여 울어야 할 까닭을 갖고 있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 사내, 품위 있어 보였고 또 이 대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보자 이 대지는 정신병원처럼 보였지.
그렇다. 성자와 거위가 짝을 이룰 때, 나 이 대지가 경련을 일으켜 부르르 떨기를 바랐다.


사내는 영웅이라도 되듯 당당하게 진리를 찾아 나섰었으나 결국은 회칠을 한 작은 작은 거짓 하나를 노획하는데 그쳤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신중했으며 선택에서도 까다로웠다. 그런 그가 단번에, 영원히 자신의 교제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사의 덕을 갖춘 계집종 하나를 찾고 있었다. 그러면 그가 졸지에 한 여인의 계집종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이제 그것을 넘어서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도면밀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교활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없이 교활한 자조차도 아내를 사들일 때는 자루채로 산다.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 그것을 너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희는 혼인이라는 하나의 긴 어리석음으로 그 한때의 어리석음에 종지부를 찍는다.


여인을 향한 너희의 사랑, 그리고 사내를 향한 여인의 사랑, 아, 이것이 고뇌하는, 감추어진 신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라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


너희에게 있어 최상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황홀한 비유일 뿐이며 쓰라린 열화일 뿐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보다 높은 길을 비추어주도록 되어 있는 횃불이다.


언젠가는 너희 자신을 넘어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 너희는 사랑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것이다.


최상의 사랑의 잔 속에도 쓴맛은 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랑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도록 하며, 그리하여 너 창조하는 자를 목타게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의 목마름,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과 동경, 말하라. 형제여, 이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드는 의지인가?
나 그와 같은 의지와 그와 같은 혼인을 신성하다 하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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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다들 고픈, 결혼을 해도 다들 사랑에 목마른  시대이지만 점점 더 연애가 어려워지는 시대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틱톡같은 어플로 인해서 연애와 만남 자체는 쉬워지지만 사랑과 신뢰더더욱 어려워지는 시대라고 해야 적합하려나.


니체가 여기에서 말하듯 내 안의 짐승. 욕구가 있기에 우리는 연애와 혼인과 아이를 원하는가 아니면 바닥을 모르는 외로움 때문일까. 그조차 아니면 그저 자신과의 불화 때문일까. 니체에게 이런 것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을 위한 작은 위안에 불과한 듯하다. 니체 내면의 아바타인 차라투스트라에겐 저번 젊은 여인과 늙은 여인에 대한 장에 이어서 이번에도 결국 인간에게 천 개의  목적은 단 하나로 이어진다. 바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존재 위버멘쉬를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말한다.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를 창조하기. 니체에겐 그럴 때만이 연애와 혼인이 신성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물론 현실의 니체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루 살로메라는 여인에게 구애했으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삶을 살았기에 더더욱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 혼인을 선망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니체의 자서전 격의 책인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가 직접 말했듯이 자기 자신이 그렇게나 아파했기에 "인류를 위해 쓴 위대한 선물"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저번 장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에서 창조의 고통은 종종 아이를 낳으려는 산고와 비교된다.  이 시대의 수많은 예술 창작품들은 예술가들 자신의 자식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나는 그 예술 중에서도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독립까지 이르는 것을 표현한 작품으로 늑대아이 애니메이션을 먼저 떠올린다.



 여기서부터는 당연히 스포일러가 듬뿍 담겨져 있으니 주의하시길.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유명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를 이런 니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한다면, 다소 답답할 정도로 희생적이고 일방적 사랑을 준다고 비판받는 여주인공에 대한 기존 해석도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이 애니에서 주인공은 여대생으로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보내다가 우연히 수업에서 대학생은 아닌데 청강하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만월의 밤에 조용히 자신이 늑대인간이라는 정체를 밝힌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늑대인간이라는 정체성의 비밀에도, 주인공은 오히려 더욱 사랑에 빠져들며 아이를 둘 갖기에 이른다. 이는 단순히 니체가 비판한 동물적인 사랑에 불과하고 단순히 남자가 잘생겨서 빠져드는 생의 감정적인 일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오히려 대학 생활이라는 답답하고 정해진 삶의 트랙을 도는 데 지친 대학생이라는 경주마가 기존 공동체와 삶의 도덕이라는 트랙을 박차고 늑대인간과 새로운 삶으로 뛰쳐나간 행동이 아닐까, 이게 바로 이른바 '탈주'한 것이 아닐까?



 니체를 계승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라면 이런 장면이야말로 '탈영토화' 개념의 현실화라고 말했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늑대인간 남편은 사망하지만 여주인공은 남들 눈치볼것이 적은 한적한 농촌으로 가서 두 아이, 유키와 아메를 키우며 땅을 경작하는 농부가 되는데, 이 또한 들뢰즈의 주요 철학 개념이자 탈영토화와 한 짝을 이루는 '재영토화' 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에 대해서 정교하게 논하려면 또 다른 추가적인 글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학교에 다니자 아이들은 늑대가 동화나 전설에서 나쁜 존재로 나온다는 것에 의문과 불안을 가진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없이 그런 세상의 편견과, 인간의 도덕과 싸우며 아이들에게 세상 모두가 늑대를 싫어할지라도 엄마만은 늑대의 편이라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기존의 도덕을 벗어나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것, 저번 장에 나온 임신이야말로 여성의 해결책이라는 니체의 수수께끼같은 말은 21세기에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표현된 것이 아닐까? 니체의 말처럼 진리는 여성이며, 여성은 사랑하기에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이다.


는  기본적으로 결혼제도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며 비혼주의자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지만


이런 어린아이를 창조하는 혼인이라면,


어찌 신성하지 않겠는가.






... 계속. 


다음 편은 차라투스트스라 1부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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