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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13.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4-부친살해와 에반게리온

차라투스트라 1부 끝. 혼자 걷기


베푸는 덕에 대하여 124-131p

차라투스트라가 마음에 들어 했던 도시 “얼룩소”에 작별을 고하고 떠나게 되자 제자를 자처한 많은 젊은이들이 따라 나섰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러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들에게 이제는 혼자 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홀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에게 작별 선물로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금으로 된 손잡이에는 태양을 휘감고 있는 뱀이 새겨져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뻐하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말들을 해보아라. 어떻게 하여 금이 최고의 가치에 오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금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고, 씀씀이를 따로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빛을 내는가 하면 광채 속에서도 은은하기 때문이다. 금은 언제나 몸을 바쳐 베풀기만 하는 것이다.


금은 최고의 덕의 모상으로서만 최고의 가치에 오른 것이다. 베푸는 자의 눈길은 금과 같이 번쩍인다. 금과 광채가 달과 해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최고의 덕은 흔하지 않고, 씀씀이를 따로 갖고 있지 않으며, 빛을 내는가 하면 광채 속에서도 은은하다. 베푸는 덕이야말로 최고의 덕이다.


나의 제자들이여, 진정, 나 너희를 잘 알고 있다. 너희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베푸는 덕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것을, 너희가 어찌 고양이나 늑대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제물이 되고 증여물이 되고자 하는 것이 너희의 갈증이렷다. 그 때문에 너희는 온갖 재물을 너희 영혼 속에 쌓아두기를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영혼은 만족을 모른 채 끝없이 보물과 보석을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너희의 덕이 만족을 모른채 끝없이 베풀려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일체의 사물을 강제하여 너희에게, 너희 속으로 흘러들어 오도록 한다. 그것들로 하여금 너희의 사랑의 선물이 되어 다시 너희의 샘에서 흘러나가게 하기 위해.


진정, 이처럼 베푸는 사랑은 온갖 가치를 강탈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 이런 이기심을 건전하며 신성하다 부르는 바이다.


또다른 유형의 이기심이 있으니 단지 훔치려고만 드는, 너무나도 가난한, 굶주려 있는, 저 병든 자들의 이기심, 병든 이기심이 그것이다.


그런 이기심은 도둑의 눈을 하고는 광채를 내는 모든 것을 눈여겨 본다. 허기를 면할 욕심에서 먹을거리를 넉넉히 갖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헤아려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허구한 날 베푸는 자의 식탁 주변을 어슬렁댄다.


그와 같은 욕망은 질병과 눈에 보이지 않는 퇴화를 말해준다. 그러한 이기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도둑 같은 탐욕은 신체가 병들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말해보아라, 형제들이여, 무엇이 우리에게 나쁜 것이며 무엇이 더 없이 나쁜 것이지? 그것은 곧 퇴화가 아닌가? 퇴화는 베푸는 영혼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늘 추측하게 된다.


 우리가 갈 길은 저 위로, 종에서 그것 위에 보다 높은 종을 향해 나 있다. 그러나 퇴화하고 있는, 그리하여 고작 “모든 것은 나를 위해!”라고 말하는 퇴화한 심성은 우리에게 전율의 대상이다. 우리의 심성은 저 위를 향해 날아간다. 이렇듯 그것은 우리 신체에 대한 비유가 되며 상승에 대한 비유가 된다.


 이같은 상승에 대한 비유가 덕을 일컫는 명칭이다.
생성하는 존재이자 투쟁하는 존재인 신체는 이렇게 역사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렇다면 정신은 신체에게 무엇이지? 신체가 벌이는 싸움과 승리를 알리는 전령사, 전우 그리고 메아리 정도렷다.


선과 악에 대한 모든 명칭들은 비유일 뿐이다. 그것들은 암시를 할 뿐, 말해주는 것이 없다. 그런 것들로부터 무엇인가를 알아내고자 하는 자는 바보다! 형제들이여, 너희의 정신이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려 들면, 항상 주목하도록 하라. 바로 거기에 너희의 덕의 근원이 있으니,
그럴 때 너희의 신체는 고양되고 소생하게 되리니, 신체는 자신의 환희로 정신을 매료시킨다.


 정신으로 하여금 창조하는 자, 평가하는 자, 사랑하는 자, 그리고 온갖 사물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가 되도록. 너희 심정이 강물처럼 드넓게 흘러넘쳐 가까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위험이 되기도 할 때, 거기에 너희 덕의 근원이 있으렷다.


너희가 찬양과 비난에 초연해 있고, 너희의 의지가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서 모든 사물에 명령을 내리고자 할 때, 거기에 너희의 덕의 근원이 있으렷다.


너희가 쾌적함과 부드러운 잠자리를 경멸하고 마음이 여린 자들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잠들 때, 거기에 너희의 덕의 근원이 있으렷다.
너희가 하나의 의지만을 의욕하는 자들이고, 온갖 고난의 이 전환이 너희에게 필연으로 불릴 때, 거기에 너희의 덕의 근원이 있으렷다. 진정, 그것이 새로운 선이요 악이렷다! 진정, 새롭고 깊은 물소리요 새로운 샘물에서 올라오는 소리렷다!
이 새로운 덕, 그것이 곧 힘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생각인 바 그 주위를 영리한 영혼이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황금빛 태양, 그 주위를 깨달음의 뱀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2.
이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는 사랑이 어린 눈길로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를 전과 달랐다.


“형제들이여, 너희의 덕의 힘을 기울여 이 대지에 충실하라! 너희의 베푸는 사랑과 너희의 깨달음으로 하여금 이 대지의 뜻에 이바지 하도록 하라! 나 이렇게 너희에게 당부하며 간청하노라.


너희의 덕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것을 등지고 날아오르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오르다가 날개와 더불어 영원한 벽에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할 일이다! 아, 날아가버린 덕이 그토록 많은 터에!
내가 그리하고 있듯 날아가버린 덕으로 하여금 다시 이 대지로 돌아오도록 인도하라. 그렇다. 신체와 생으로 돌아오도록 하라. 이 대지에 의미를, 하나의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도록 말이다!
지금까지 덕이 그랬듯이 정신 또한 백 번이나 날아갔고, 날다가 떨어지고는 했지, 아, 우리의 신체 속에는 아직도 이 모든 미망과 실수가 자리하고 있으니, 그것들이 아예 신체가 되고 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덕이 그랬듯이 정신 또한 백 번이나 시도했고, 그때마다 길을 잃고 헤맸지. 아 , 가람은 일종의 시도였으니, 아 그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에게 신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수천 년 된 이성뿐만이 아니다. 그 광기까지 우리에게서 폭발한다. 상속자가 된다는 것,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우연이라고 하는 저 거인과 한 걸음 한 걸음 싸워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난센스, 즉 무-의미라는 것이 전 인류를 지배해왔다.


형제들이여, 너희의 정신과 덕으로 하여금 이 대지의 뜻에 이바지 하도록 하라. 그리고 모든 사물의 가치는 너희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투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너희는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체는 앎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 그리고 앎을 통한 시도에 의해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깨친 자에게는 모든 충동이 신성시 된다. 고양된 자의 영혼은 기쁨을 맛보게 되고.


의사여, 너 자신을 돌보아라. 그렇게 하는 것이 너의 환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환자로 하여금 먼저 그 자신을 치유한 자를 눈으로 보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 환자에게는 최선의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길이 천 개나 있다. 천 개나 되는 건강과 숨겨진 생명의 섬이 있다. 무궁무진하여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 사람이며 사람의 대지다.


너희 고독한 자들이여, 깨어나 귀기울여보아라! 미래로부터 은밀히 나래를 퍼덕이며 바람이 불어오고 있으니, 명민한 귀에는 복음이 들려오고 있고.


오늘을 살고 있는 고독한 자들이여, 물러나 있는 자들이여! 너희도 언젠가는 민족을 이루어야 하리라. 스스로 자신을 선택한 너희로부터 선택된 민족이 나와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위버멘쉬가 나와야 하고.


진정, 이 대지는 치유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미 대지 주변에는 새로운 내음, 건강에 좋은 내음이 감돌고 있다. 거기에다 새로운 희망이!“

3.
차라투스트라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남겨놓은 사람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손에 든 지팡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마침내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를 전과 달랐다.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길을 가련다! 너희도 이제 헤어져 한 사람 한 사람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라! 나 그러기를 바라노라.


나 진정 너희에게 권하노니,나를 떠나라.그리고 이 차라투스트라에 맞서 너희 자신을 지켜라! 더 바람직한 일은 그의 존재를 수치로 여기는 일이다!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면 적을 사랑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영원히 제자로마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는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 그 숭배가 어느 날 뒤집히기라도 하면 어찌할 것인가? 입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를 믿고 있다고 말하려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무엇이기에! 너희는 나를 따르는 신도들이렷다. 신도가 무엇이기에!


아직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찾아 나서지 않고 있다. 그 상태에서 나를 찾아낸 것이다. 뭔가를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이다. 그러니 신앙이란 것이 하나같이 그렇고 그럴 수밖에


너희에게 명하노니, 이제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해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진정, 나는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내가 잃은 자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러고 나서 지금과는 다른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언젠가 너희는 내게 벗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희망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 너희와 함께 위대한 정오를 기리기 위해 세 번째로 너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위대한 정오란 사람이 짐승에서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 한가운데 와 있고, 저녁을 향한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찬미하게 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 길이 곧 새로운 아침을 향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몰락하고 있는 자는 그 자신이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축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깨달음의 태양은 중천에 떠 있을 것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끝





/



니체의 사상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철학이 아닌가 라는 흔한 오해 혹은 비판이 있.

하지만 이 장을 읽어본다면 단순하고 순진한 유아적 이기주의와 니체의 철학은 전혀 다르며 오히려 니체는 그런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의 철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금을 최상의 가치로 비유하면서 베푸는 덕이야말로 최상의 덕이라고 말한다. 이런 니체의 철학은 아마도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플라톤은 인간이 본받아야만 할 천상계의 이데아 중에서도 최상의 이데알로 선, 좋음의 이데아를 꼽았지만 니체가 볼때는 그런 이데아를 모방하려고 하늘의 별자리를 억지로 흉내내며 대지에 살고 있는 자기 신체를 훼손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것은 미친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 뱀이 중요한 이야기의 장치로써 차라투스트라가 애지중지하는 동물로 나온다. 이는 누가 봐도 명확하게 기독교 창세기부터 나오는 악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뱀의 이미지를 역전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브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해서 신의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그 뱀. 뱀의 혀라는 관용어가 암시하듯이 뱀은 사악하고 요사스러운 이미지로 흔히 사용되지만, 니체가 보기엔 바로 선악과를 먹었기에 인간이 단순히 신의 부속물이나 다름없었던 낙원에서 나올 수 있었고 대지에서 자기의 삶 자기의 길을 새로이 개척할 수 있었던, 지혜스러우면서도 인간에게 덕을 베푼 동물이 바로 뱀이 아닐까.


스스로 제물이 되고 증여물이 되어서까지 타인에게, 자기 주변의 가까운 이웃보다는 먼 이웃에게 베풀기를 권하며 그걸 위해서는 가치의 강탈과 창조가, 투쟁이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그저 자기 욕심만 채우려 드는 이기적인, 가난하고 퇴화한 심성과는 달리 신성하고 건전한 베푸는 덕을 권하며, 그것을 위해 자기를 따라온 추종자들에게 자기를 떠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너희들은 왜 스승의 월계관을 빼앗고 싶어하지 않느냐고, 위대한 정오의 시간에 위버멘쉬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외친다.




많은 시간들 중에 위대한 정오를 니체가 강조한 것은, 정오야말로 해가 가장 높이 떠있고 대지가 가장 따뜻해지며 인간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진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하늘을 부정하고 저주하는 것만으로는 대지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하늘로부터 힘을 받아 대지의 자기 신체를 가장 강성하고 활기있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위버멘쉬로 건너갈 수 있는 적기라고 니체는 이미지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허나 이런 정오가 와도 각자의 그림자는 다르게 드리워진다. 자기의 그림자와 자기의 활력은 결국 타인이 알 수도 대신 활용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자기를 따라오고 심지어 숭배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자신에게 돌아가라고, 스승을 따르기보다는 스승의 월계관을 낚아채고 싶지 않냐고 권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21세기 서브컬쳐 장르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문화적 줄기 중 하나인 부친살해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런 부친살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애니메이션계의 고전으로 어제 미술관 기행에서도 살짝 언급한 95년작 에반게리온을, 그 중에서 작중의 주인공 신지의 아버지인 겐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항상 모든 리뷰성 글에는 스포일러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매드맥스와 마찬가지로 에반게리온 같은 업계의 걸작은 자칫 글쓴이의 스포를 통해 원작을 보는 맛을 해칠까 두렵다. 그래서 이번에도 더 자세한 글은 스포일러 에세이를 따로 쓰는 편이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더 나은 대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좀 더 글을 써보려 했지만, 역시 넷플릭스같은 거대 사이트에도 이제 에반게리온이 올라오는 세상이니 직접 보시길 권한다. 아래와 같이 농담같은 짤방도 나올 정도로 이제 사골게리온이라 욕먹기도 하는 1995년작 고전 작품이지만, 2019년에 보아도 충분히 영상미적이나 음악적이나 스토리텔링적 묘미로나 압축적이고 상징적인 작품이다. 자칫 너무나 압축적이어서 길을 헤메기 쉬울만한 미로이기도 하다. 까짓꺼, 한번 제대로 정주행하면서 서브컬쳐 애니 덕후의 길로 입문해보는 것도 어떻겠는가?반게리온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명작이다.






계속... 스포일러 에세이로 다시 꼭 돌아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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