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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15.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5-에반게리온 스포일러 에세이1

차라투스트라 2부 시작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140-144p


(니체 전집 번역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에서 다수 인용 및 필사함)

무화과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열매는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을 터뜨린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불어닥치는 삭풍이다.


그리하여, 벗들이여,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듯 여기 이들 가르침 또한 너희에게 떨어지고 있다. 자, 그 열매의 즙을 빨고 달콤한 살을 먹도록 하라! 때는 온통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지금은 오후다. 보라, 그 어떤 충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가! 차고 넘치는 풍요에 둘러싸여 멀리 바다를 내다보니 아름답기만 하구나.


일찍이 사람들은 먼 바다를 바라보고는 신을 이야기했지. 그러나 나 너희를 가르쳐 위버멘쉬를 이야기하도록 했다.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 나는 너희의 억측이 너희의 창조 의지를 뛰어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너희는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일체의 신들에 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이여, 너희 자신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자신으로 하여금 위버멘쉬의 선조가 되고 조상이 될 수 있도록 거듭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창조이기를!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나는 이 억측이 너희가 할 수 있는 사유 범위 안에 한정되기를 바란다


너희는 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 하지만 모든 것이 사람이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너희에게 진리를 향한 의지를 의미하기를! 너희는 너희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세계라고 불러온 것, 그것도 너희에 의해 먼저 창조되어야 한다. 너희의 이성, 너희의 심상, 너희의 의지, 너희의 사랑이 세계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너희의 복을 위해, 깨달음에 이른 자들이여!


깨달음에 이른 자들이여, 이러한 희망 없이 어떻게 삶을 참고 견뎌내려는가? 너희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나 비이성적인 것을 태생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벗들이여, 너희에게 나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건대.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나 이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이제는 그 결론이 나를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 그러나 그 누가 이 억측이 일으키는 번민 모두를 마시고도 죽지 않을 수 있으랴? 창조하는 자에게서 신념을, 독수리에게서 까마득하게 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야 하는가?
신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착상의 하나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시간은 사라졌을 것이고, 덧없는 모든 것은 거짓일 뿐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사지는 소용돌이치고 현기증을 일으키며 위장은 구토를 일으킨다. 진정, 그와 같은 것을 억측하는 것, 그것을 나는 어지러움병이라고 부른다.


유일한 존재, 완전한 존재, 부동의 존재, 충족적인 존재 그리고 불멸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 모두를 나는 악이라고 부르며 인간 적대적이라고 부른다!


일체의 불멸의 존재,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 시인들이 너무도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최상의 비유라고 한다면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런 비유는 일체의 덧없는 것들에 대한 찬미가 되어야 하며 정당화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창조, 그것은 고뇌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가볍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뇌가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자신이 다시 태어날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산모가 될 각오를 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진정, 나 백 개나 되는 영혼을 가로질러, 백 개나 되는 요람과 해산의 고통을 겪어가며 나의 길을 걸어왔다. 나 이미 허다한 작별을 경험하기도 했고, 그리하여 미어질 것만 같은 마지막 순간들을 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의 창조적 의지, 나의 숙명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너희에게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바로 그러한 숙명을 나의 의지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느낌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내게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감옥에 갖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욕은 언제나 나를 해방시켜주는 자이자 기쁨을 전해주는 자로서 나를 찾아온다.


의욕은 해방을 가져온다. 그것이야말로 의지와 자유에 대한 참다운 가르침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지금 그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있노라.


더-이상-의욕하지 않기. 더-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 아, 이 크나큰 피로가 나를 떠나 영영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깨닫는 일에서도 나는 내 의지가 갖고 있는 생식-욕구와 생성-욕구만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깨달음에 순진무구란 것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생식에 대한 의지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이 의지가 나를 유혹하여 신과 신들에게 등을 돌리도록 했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창조할 그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불과 같은 창조 의지는 언제나 새롭게 나를 사람들에게로 내몬다. 망치를 돌로 내모는 것이다.


아, 너희 사람들이여,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내 머리 속에 있는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아, 그 형상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보기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이나 자야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무섭게 때려 부순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리고 있구나.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저 형상을 완성하고자 한다. 내게 어떤 그림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경쾌한 것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위버멘쉬의 아름다움이 그림자로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아, 형제들이여! 신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인간은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 적어도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불행원하는 사람 그조차 자신이 원하는 것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것을 어찌 행복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니체의 분신, 문학적 아바타 차라투스트라는 1부 마지막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 자기를 숭배하지 말고 너희 자신이 되라고, 심지어 스승의 월계관을 왜 낚아채려 하지 않냐고 대놓고 권하고서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는 행복이 가득한 섬으로 간다. 무화과는 주로 기독교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깨닫자 무화과 잎으로 성기를 가렸다 라던가 예수가 무화과 나무에 앞으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 일화 등등 자주 활용되는 상징이며, 문학계서 전반적으로 하나의 비유로 쓰인다. 이를 좀더 깊이 알기 위해 황인찬 시인의 시를 하나 살펴보자.









  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성경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의 일화에서 나온 것처럼 무화과 나무는 일종의 잃어버린, 돌아갈 수 없는 낙원을 상징한다. 황인찬 시인의 이 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무화과 숲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은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밥을 먹고 눈을 감고 꿈을 꾼다. 잃어버린 낙원으로 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혼나야 할 죄이지만 꿈에서는 그런 사랑을 해도 혼나지 않는다고 ... 시인은 꿈에서나마 안심하는 것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가 무화과 열매가 가득한 행복이 가득한 섬에 당도한 것은 바로 신에 의해 인간에게  금지된 성역, 잃어버린 낙원을 인간이 자신의 대지로, 위버멘쉬가 춤추는 땅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무화과라는 상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니체의 말처럼 자신이 바로 신이 되려는, 노골적으로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 바로 1995년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애니 이름부터가 창세기가 아닌 Neon Genesis 신세기 즉 새로운 창세를 예고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본격적인 스포일러 리뷰 연재가 시작되니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으신 분은 꼭 넷플릭스나 라프텔 등등 경로로 최소한 티비판 26화중 4화 이상을 정주행하시길 권한다. 일본 애니의 버블이 아직 꺼지기 전 마지막 불꽃같은 작품이라 미술적이든 음악적이든 충분히 만족하면서 순식간에 밤을 새게 될 지도 모른다.




에반게리온을 감상하다 보면 특무기관 네르프의 저 상징과 끝없이 마주치게 된다. NERV 라는 이름을 반쯤 가리는 저 나뭇잎이 바로 무화과 잎이며, 이는 네르프가 단순히 정체모를 사도의 침략에서 인류를 지키기 위한 기관이 아니란 것을 예고하는 복선이다. 조직의 엠블럼에 있는 문구도 영국의 월리엄 골딩의 피파가 지나간다 라는 유명한 시 문구에서 따온 것이며, 한국어로 해석하면 신께서는 그의 천국에 계시면 세상 모든 것이 별일없다. 잘 되리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의 품, 신의 세계에서 이제 대지의 인간들은 분리, 독립해서 따로따로 살아가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애초에 인류를 멸망시키는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기 위해 쳐들어온다는 적의 이름이 왜 사도, Angel 이라고 명명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존재가 죽고 나면 일관적으로 십자가 그 자체인 폭발이 일어나는 것일까. 제목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것과 더불어 생각하면 더욱 의문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사항이다. 에바를 타고 싸우는 주인공들은 사실은 신의 사도를 죽이는 사투를 벌였던 것이며, 그런 인간의 한계를 넘는 전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창세기를 여는 것이 가능했던 것 아닐까.


티비판 애니메이션 중에 그냥 슥 지나가는 장면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은, 적나라하게 주인공 신지의 아버지 겐도의 역할을 십자가를 진 예수에 비유하는 표현이 아닌가. 기독교에서 인류가 예수의 탄생과 희생 이후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겐도는 극중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치 예수처럼 고된 짐을 지고 희생하는 것일까? 그는 니체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새로운 신이 되기 위해 기존의 신을 죽이려 하는 것인가?




계속... 에반게리온 스포일러 에세이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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