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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Apr 15. 2022

2022-04

걷고 달리며 종종 남겨둔 기록

*04-01-금

3월 31일 자로 결국 팀원이 퇴사했다. 떠나는 순간까지 망친 시험지를 붙들고 있는 얼굴이라서 이곳이 꼭 정답은 아니니 오답을 낸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정답으로 이끌어주지도 못했으면서 위로랍시고 괜한 말을 건넨 것 같아서.

공교롭게도 이번 주는 내 팀원 포함 주변 3명이 퇴사하는 바람에 덩달아 헛헛해져 전 회사 사수를 만나 밥을 얻어먹었다. 사람이 오가는 시점에 부침이 심한 편이라 힘들었는데 너는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서 그럴 거라는 말이 위안이 됐다. 내게 풍요로운 삶은 매번 같은 사람과 만나 매번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삶인데 곁을 지켜주는 이들덕에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돌아오는 길에 팀원에게 전화해 언젠가의 밥 약속 대신 구체적인 술 약속을 잡았다.

해가 길어진 덕에 4월의 첫 달리기를 공터에서 할 수 있었다. 코로나 후유증 탓에 여전히 숨은 가빠 자주 걷다 달리곤 했지만 쉬지 않고 20분을 채워서 기분 좋았다. 뜨끈하게 샤워하고 자기 전 장국영의 '아비정전'으로 4월 1일 마무리.


*04-03-일

주말 내내 음악 페스티벌을 부르는 맑은 날씨라 좋아하는 음악들로 골라 틀어놓고 대청소-이불 빨래-옷 정리-분갈이까지 밀린 집안일 페스티벌을 했다.. 룰루.. 개운해진 마음으로 5시 즈음 가뿐하게 달리러~

청소하며 들었던 퀸의 don't stop me now가 공터로 가는내내 맴돌아서 오늘의 러닝송으로 택해 들으며 달렸는데 웬걸 너무나 안성맞춤이었다!

투나잇~ 전주에서는 한껏 웅장한 가슴으로 서서히 달리다가 해빙어굿타임~ 부터 전력 질주해서 후반부 라라라~ 부터 걸으며 잠시 숨 고르면 딱! 그렇게 8번쯤? 반복 재생하다 보니 30분 순삭!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달리는데 뿌듯하게 행복해져서 이대로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달리기를 마칠 즈음 친구와 두유가 공터로 마중을 와줘서 인근에서 더 걷다가 좋아하는 빵집에서 케이크도 사고 와인도 사서 집에 와 밥 먹고 케이크에 와인 홀짝이며 영화를 봤다. 이럴 때 행복이 별건가 싶다.


*04-04-월

오늘 회의에서 1.5~2배속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2030대가 많다는 얘길 들었다. 배속 감상은 양반이고 단역이나 풍경씬이라도 나오면 건너뛰며 보는 이들이 대다수라기에 많이 놀랐다. 이건 마치 유튜브 요약본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랄까... 지금 하는 회의가 무슨 의미냐며 웃어넘겼지만 극장주의자인 이들 모두 조용히 허무했다.

코시국에 급격히 커져버린 ott 플랫폼들로 콘텐츠는 다양해졌지만 동시에 전반적으로 질적 수준이 낮아졌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요즘 읽고 있는 시나리오들 역시 애초에 극장 개봉이 아닌 ott에 맞춰진 경우가 많아 좋은 주제와 설정을 갖추고도 그 깊이가 다소 얕아보여 아쉽다.

잘 만든 작품을 만나기가, 아니 기획부터가 예전보다 쉽지 않다 보니 원석을 발견했을 때처럼 반짝임에 흥분하며 일해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지금의 회의가 언제 극장에 걸릴지, 또 넷플릭스로 갈런지, 아니면 이대로 묻힐지 아무도 장담할 순 없지만 여하튼 즐겁게 하고 싶다. 그 기운이 결국 결과물에도 실려 전해질 테니까.

안그래도 피곤한 월요일 (가급적 즐겁게) 마라톤 회의를 하고 집에 와 늘어질까 고민하다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공터는 어두워서 못 가고 대신 트레드밀 경사를 높여 야간 산행이라 상상하며 걸었다. 세상은 점점 간편해지더라도 꾸준히 성실한 사람들이 조금 더 잘 됐으면 좋겠다.


*04-08-금

코로나로 여차저차 미뤄지다 근 3개월 만에 본가에 왔다. 배 두둑이 저녁을 먹고 나서려는데 호흡이 버겁고 무거운 느낌이 들어서(과식의 증거..) 바로 트랙으로 가지 않고 근처 양재천 산책로를 좀 걸었다. 종로보다는 확실히 봉오리가 활짝 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익숙하고 그리웠던 길을 걸어 트랙으로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웠다. 한 번도 쉬지 않고 한 바퀴를 돌았다. 숨도 덜 가쁜 느낌! 평소 달리곤 하는 흙바닥은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라 간혹 돌부리에 걸리는 경우를 부단히 신경쓰며 달렸다는걸, 트랙을 달리며 알았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운동장에는 나처럼 걷고 달리는 서너명의 사람들이 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드넓고 무해한 이 곳에서 어둠을 틈타 프렌즈의 피비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봤다. 같이 달리던 레이첼이 부끄러워 러닝 코스를 바꿀 만큼 피비 못지않게 아무렇게나 뛰어봤지만 정자세(는 아니겠지만)로 뛸 때보다 훨씬 힘들고 금세 숨이 찼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는 어쩌면 힘을 빼는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통을 챙겨오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목이 타서 4km 알림음과 동시에 돌아가기로 했다. 평소보다 기록도 단축되고 애먼 신경과 힘을 들이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나는 애송이이므로.. 다음 번 이사는 꼭 러닝코스를 염두에 둬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


*04-16-토

간만에 손님들이 집에 오는 날이라 점심 먹고 운동부터 다녀왔다. 볕이 좋아 트레드밀보다는 밖에서 달리고 싶어 공터로 왔다. 6km로 정해두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운동한 직후라 오히려 각성(?)이 된 건지 몸이 가벼워 달릴 맛이 났다. 어느새 세월호 8주기. 날씨가 화창할수록 마음은 어둡다. 달릴 수 있는 일상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겠단 생각을 다졌다.


*04-19-화

원치 않는 일을 맡아 심란한 요즘이다. 작년 말 즈음부터 진행해왔던 프로젝트는 코로나 여파로 업계 상황이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어 잠정 중단된 탓이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겠냐만은 감사하게도 지금껏 하고 싶은 일만 좇아 여기까지 왔다. 어쩌다 보니 나이와 연차가 꽤 쌓인 지금, 올해는 하기 싫은 것도 시도해 봐야겠다고 다짐했기에 어떻게든 해봐야겠다 마음먹긴 했지만 심란한 건 마찬가지. 퇴근 후 트레드밀 위를 걸으며 좋아하는 것들만 떠올렸다.


*04-21-목

세 차례 연속 마라톤 회의로 달리고 퇴근 후 또 달리러 나왔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2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이후 20분은 인터벌로 걷뛰걷뛰. 가끔 가슴이 갑갑해 크게 숨을 몰아쉬곤 했었는데 잠시라도 달리는 습관을 들였더니 착실히 회복 중. 심폐 회복도 몸의 변화를 조금씩 체감해가는 것도 기쁘다. 몸과 머리를 열심히 달려준 덕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선택에 결정 내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04-22-금

소오리질러어 휴가~ 아침을 챙겨 먹고 모처럼 운동으로 하루를 열었다. 어제 쉬지 않고 20분 달린 김에 속도를 높여 3km 쭉 달려보기로 마음먹고 속도를 높여보며 달렸다. 아침에 보는 트레드밀 뷰가 낯설었다. 밤에는 깜깜한 어둠을 흑막 삼아 그날 하루를 띄워놓곤 했는데 환할 때 보니 또 달랐다.

달리면서 센터 앞 나무들이 8그루라는 것도 횡단보도 초록불과 빨간불 사이 텀이 1분54초라는 것도 알았다. 운동 올 때마다 유독 가는 거리도 멀고 빨간불도 묘하게 긴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기분 탓이었나 보다. 달리는 리듬과 1분54초에 맞춰 바뀌는 신호등 색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3km를 훌쩍 달렸다. 아침 운동은 작년에 수영 새벽반을 다녔던 이후 꽤 오랜만이었는데 너무너무 개운해서 다시 수영이 간절해졌다. 이제 곧 여름이기도 하니까.


*04-24-일

강화도로 짤막한 휴가를 다녀왔다. 일부러 한적한 한옥으로 숙소를 잡아 90년 된 툇마루에서 커피도 내려마시고 책도 읽고 낮잠도 자고 숲에서 산책도 하면서 푹 쉬고 왔다. 정리를 하고 쉴까 하다가 볕도 좋고 간만에 밖에서 달리고 싶어져 나왔다. 나올 때만 해도 피곤하다 싶었는데 그간 달려온 덕인지 어쩐지 숨도 편하고 잘 달려져서 비슷한 속도로 20분을 쭉 달렸다. 잘 먹고 잘 쉬는 게 이렇게 몸에 이롭다.

그사이 공터에는 못 보던 하얀 꽃이 피어있었는데 지나칠 때마다 코 언저리 달큰한 향 덕에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었다. 고마운 꽃 이름이라도 알아두자 싶어서 찾아봤더니 고광 혹은 야광나무 꽃이었다. 꽃잎이 4개면 고광나무. 5개면 야광나무라고 하는데 내가 본 나무에는 이파리 4-5개가 섞여있었다. 야광나무 꽃은 밤에 빛을 발한다고 하니 조만간 밤에 확인하러 와야지. 좋아하는 것들로만 골라 채워 넣은 주말 덕에 어느새(!) 4월의 마지막 주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뿌듯하다.


*04-26-화

어제는 스쿼트로 60kg를 들었다. 난생처음 드는 무게였는데 생각만큼 무겁진 않았다. 아니 무거워도 버틸만했다. 앞으로 얼만큼 들 수 있을지 궁금해져서 선생님한테 물었더니 한계가 어디 있어요 회원님~ 그건 쌓아가는 거지 미리 정해놓는 게 아니에요~ 라는 모범 답안을 듣고 3세트를 더 하고 유산소 40분을 추가해주셨다..^.^..

트레드밀을 달리며 얼마나 더 들 수 있을지 혹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달리며 늘상 떠올리는 생각들은 대부분 무작위 공상이지만 올초부터 어떤 직업적 테두리를 벗어나 생업으로서의 고민이 자주 들썩이곤 했는데. 나의 한계치라고 생각했던 무게를 넘어선 지난밤은 여러 생각이 한 방향으로 맴돌았다. 그래서 앞으로 뭐해먹고 살지!?


*04-27-수

지난 새벽 불쑥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낯간지러워 삼켰을 말들을 술기운 덕에 들을 수 있었다. 종일 기분이 좋았던 걸 보면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들과 미리 짐작하고 애써 숨겨놓은 것들은 사실 세상에 꺼내져야 할 운명이 아닌가 싶다.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말이다.

오늘은 마침 형님의 생신이라 운동을 마치고 오는 길에 불쑥 연락을 드려 응원을 전했다. 한 달 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고대하며.

- 형님~ 오늘 프로필상(!) 생신 축하드립니다! ^.^ 건강히 촬영하고 계시는지요? 겸사겸사 안부 전해봅니다 오늘 맛있는 식사 드시고 틈틈이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 잘 지내지? 여긴 매일 35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살인적인 스케쥴로 매일 미쳐간다.. 넘 그립다 한국이.. 벌써 한 달 반이 넘었어 앞으로 한 달 더 있어야 돼.. 누굴 탓하겠냐? 이걸 선택한 내 잘못이지.. 암쪼록 건강하게 잘 지내구.. 들어가서 시원하게 막걸리 한 사발하자!!


*04-28-목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는 대본을 읽었다. 이미 결말까지 다 알고 있는데도 4부까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고 피드백을 드렸더니 감독님은 그제서야 한숨 돌렸다는 미소를 지으셨다. 캐릭터나 구조적으로 어떻게 더 매끄럽게 만지면 좋을지 한참 의견을 나누고 헤어졌다.

어제 경사로 30분을 달렸더니 허벅지 부근이 당기는 느낌이 들어서 3km를 걷다 뛰다 했다. 걸으며 회의를 떠올려보다가 내가 의견을 전하기에 급급해 당시의 흥분을 다 미처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정돈된 사실도 중요하지만 때론 마구잡이 감상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투자 업무도 병행하면서 영 의욕이 안 붙고 있던 차에 대본 하나로 자그마한 불씨가 생겼다. 좋은 콘텐츠만으로도 충분한 동력이 된다. 이럴 때 이 일의 매력을 느낀다.


*04-29-금

간밤 시원하게 내린 비 덕에 기분도 개운했다. 오늘은 무조건 퇴근하고 밖에서 달리리라 다잡는 다짐은 퇴근 후 집에 오면 꼬리펠러로 반겨주는 두유를 보면 와르르. 그나마 길어진 해도 저녁 산책 다녀오는 길에 뉘엿뉘엿. 그래서 오늘 밤도 트레드밀에서 5km 달리고 왔다. 그래도 꾸준히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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