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친 이유는 나에게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지친 이유였고,
지쳤음에도 퇴사하지 못한 이유였다.
신기술의 최전선에서 기술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불안정한 시장의 업다운을 즐기며 가설을 세우고,
스타트업에서 내 역할을 스스로 정의하고 해내고 어필하고,
팀원들과 이것이 전부인마냥 밤낮으로 프로덕트에 몰입하는 프로덕트 매니저의 삶.
을 동경했다.
스타트업에 조인해 피엠이 되면 시간이 흐른 뒤 그런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나는 기술을 이해할지언정
밤낮으로 이 새로운 기술이 어떤 일을 어떻게 가능케하는지 찾아보는 사람이 아니었고,
불안정한 시장에 함께 불안해했고,
누구도 내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정의해주지 않는 스타트업이 힘에 부쳤고,
한자리에 앉아 몰두해서 밤 늦게까지 일하는 문화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일을 못하지 않아서, 회사에 진심이었어서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노력해서 버티고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 줄 알았으니까.
한편으론 2021년 여기에 오기로 한 나의 선택이 옳은 결정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실패하고 지는 것 같았다.
이 마음들을 인지하게 된 순간 깨달았다.
내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지 못하고 있었구나.
내가 만든 ‘이상의 나’에 ’현실의 나‘를 계속 끼워넣고 있었구나.
내가 자연스럽게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의 가치를 더 낮게 매기고 있었구나.
나의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던 생각들을 바라보며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비엔지니어 입장에서 기술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이해시킬 수 있다.
나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즉, 본질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명료한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
나는 움직이는 일이 좋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나에게 에너지를 준다.
나는 윗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말귀를 아주 잘 알아듣는다.
나는 이른 아침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나는 큰 환경에서 체계적으로 일을 배워나가고 싶다.
나의 에너지는 이런 방향으로 흐른다.
근데 그 반대 방향으로
-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
‘신산업의 스타트업에서 PM으로 일하는 이상적인 누군가’를
스스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도달하려하니 지친 거였다.
회사와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실망의 시간을 지나
지금은 중요한 시기에 나에게 솔직해질 수 있음에
더 늦지 않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음에
너무나도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만 남았다.
‘나’에 대한 정의는 계속 업데이트 해나가겠지만
누가 뭐래도
늘 현재의 나에게 솔직할 수 있는
그래서 앞으로는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나답게 일할 수 있는 나를 기대하며
내 커리어의 첫번째 챕터를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