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별일 없어요."
저는 이 말을 습관처럼 내뱉습니다.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가족이 괜찮냐고 물어볼 때도, 나 자신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낄 때조차도. 이 말은 제가 세상에 내보이는 가면이자, 동시에 나 자신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합니다.
언뜻 밖에서 보기에 저는 무던한 사람입니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고,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으며, 늘 차분해 보인다고. 하지만 이 무던함이 얼마나 의도적이고 계산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볼륨을 최대한 낮춘 라디오처럼, 저는 의식적으로 감각의 다이얼을 돌려 세상의 소음을 줄여왔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접한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개념이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초민감자'란 감각 처리의 민감성이 평균보다 높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음 문항들로 간단히 HSP 자가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감각적 민감성
□밝은 조명이나 큰 소리에 쉽게 압도된다
□ 카페인이나 특정 음식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 옷의 재질이나 태그가 신경 쓰인다
□ 강한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감정적 민감성
□ 다른 사람의 기분 변화를 쉽게 감지한다
□ 영화나 책의 폭력적인 장면을 보기 힘들다
□ 다른 사람이 화를 내면 나도 덩달아 불안해진다
□ 예술작품이나 음악에 깊이 감동받는다
자극 과부하
□ 바쁘거나 복잡한 환경에서 쉽게 지친다
□ 하루 종일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다
□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 시간에 쫓기면 평소보다 실수를 많이 한다
깊은 처리
□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많은 것을 고려한다
□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미묘한 변화를 발견한다
□ 철학적이거나 영적인 주제에 관심이 많다
□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위 항목 중 10개 이상 해당한다면 HSP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14개의 항목에 해당되네요.
제 몸은 특히나 스트레스에 취약합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즉시 소화불량이 찾아오고, 수면패턴이 무너지며, 피부가 뒤집어지고, 두통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머리가 아프고,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100이면 100 지쳐서 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HSP에게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더군요. 24시간 켜져 있는 네온사인, 끊임없는 알림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환경들. 이 모든 것들이 초민감자에게는 지속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됩니다. 초민감자의 삶에서 피로는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견뎌내는 일상적인 자극들도 우리에게는 과부하가 될 수 있죠. 지하철의 소음, 사무실의 형광등, 동료들의 대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쌓이고 쌓여 만성적인 피로감을 만듭니다.
그래서 저 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습니다.
1. 감각 차단하기: 이어폰을 끼고 다니고,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도 안경을 쓰지 않으며, 향이 강하지 않은 제품들을 선택한다.
2. 에너지 관리: 사람들과의 만남 후에는 반드시 혼자만의 재충전 시간을 갖는다.
3. 경계 설정: "아니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모임에 참석할 필요도,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의무도 없다.
4. 무던함의 연출: 내적으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을지라도, 외적으로는 평온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이는 거짓이 아니라, 내가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개발한 하나의 기술이다.
사람들은 종종 "예민하다"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마치 결함이나 약점인 것처럼. 하지만 저는 이 예민함이 세상을 더 섬세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고유한 능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친구가 "괜찮다"라고 말할 때, 그 뒤에 숨겨진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죠. 예술 작품 앞에서 남들보다 더 깊이 감동받을 수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더 큰 위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직감이 예리합니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첫인상이 대부분 맞아떨어지거나, 창의적인 작업에서도 이러한 민감성이 큰 장점이 됩니다.
초민감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 끊임없이 협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열면 과부하가 걸리고, 너무 많이 닫으면 세상과 단절되니까요. 그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 과제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제 스스로 민감성을 관리하고, 때로는 활용하기도 하면서 무던함은 내가 세상에 보여주는 하나의 얼굴일 뿐, 내 본질은 여전히 깊고 예민하고 섬세하다고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세상은 빠르고 시끄럽고 거칠지만 초민감자들에게는 우리만의 속도가, 우리만의 리듬이 있습니다. 그것을 존중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깨닫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