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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이메일과의 싸움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얀 작성창이 저를 맞이하고, 동시에 고민이 시작되죠. 어떤 톤으로 시작해야 할지. 정중하되 너무 딱딱하지 않게, 친근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 항상 긴장을 하곤 했습니다.
저의 업무 특성상 한국어뿐만 아니라 일본어로도 메일을 써야 합니다. 한국어로 그리고 또 일본어로 이메일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언어에는 고유한 비즈니스 문화와 소통 방식이 스며있기 때문이죠. 고민 끝에 결국 챗GPT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이메일을 쓰고 나면 묘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게 정말 '내가' 쓴 이메일일까?
더 큰 고민은 이런 도구에 의존하다 보면 점점 제 자신의 표현력이 위축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예전에는 어설프더라도 제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들이, 이제는 AI가 만들어준 완벽한 문장에 가려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전 연습에 들어갔죠. 이메일의 포인트는 상대가 알아보기 쉽게 정중한 말투로 간결히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제게 오는 이메일이나 동료의 이메일을 관찰하였습니다.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하고,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지. 받는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기 쉬운지, 오해의 소지는 없는지.
특히 일본어 이메일처럼 문화적 맥락이 중요한 경우, 단순 번역이 아니라 그 나라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한국어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일본어로는 몇 번의 완곡한 표현을 거쳐야 합니다. "이 부분을 수정해 주세요"가 "この部分について、ご検討いただければと思います。 이 부분에 대해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음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제가 정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상대방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요. 하얀 작성창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도 결국 더 나은 소통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예의와 격식은 지켜야겠지만, 그 안에서도 저만의 색깔을 담을 수 있다면 좋으니까요.
오늘도 하얀 작성창 앞에 앉았습니다. 여전히 고민스럽지만, 예전처럼 막막하지는 않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제 마음을 담아가며, 상대방을 생각하며 쓰는 이메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요. 하얀 작성창은 여전히 저를 맞이하지만, 이제는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