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ISFJ에게 즉흥이라는 건 없다. 모든 것은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다. 계획을 한 후에 지키지 못할지라도 먼저는 계획을 해야 한다. 여행 갈 때 일정표를 세분화시키는 것은 기본이며, 작게는 씻는 것도 몇 시에 씻어야지 하고 계획을 한다. 일정을 소화하러 집을 나오면 나온 김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적어놓고 실행할 때마다 브이표시로 체크를 해서 없앤다. 그럼 함께 따라오는 쾌감. 이 무슨 변태적인 자아인가 싶기도 하지만 받아들이며 살아온 지가 대략 12년 정도 된 것 같다. (내 자아를 깨달은 지)
남편과 여행을 갈 때면 나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있다. 여행지 정보 마스터하기이다. <관광지>의 이름, 위치, 주의할 점, 교통, <맛집>의 이름, 위치, 오픈&클로징 시간, 베스트메뉴, 가격 등 내가 살핀 모든 정보들을 아주아주 빼곡하게 일정표 안에 적어놓는다. 이렇게 일정을 짜고 나면 나는 그 여행지의 모든 정보를 거의 알게 된다. 이것의 장점은 거리를 쉽게 측정할 수 있다는 것,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필요한 준비물을 미리 챙길 수 있는 것,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것 등으로 말할 수 있다. 단점은 사진에서 본모습과 현지의 느낌이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정보를 찾으며 이미 많은 것을 봤으니 여행을 한번 한 셈이나 다름없어서 시시할 수도 있다는 것, 오픈인 줄 알고 갔는데 휴무일 경우 계획이 어그러짐에 있어 화가 난다는 것,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하고 여행 와서 놀던 중, 갑자기 비가 왔다. 나는 분명히 날씨를 보고 왔는데 전날까지 날씨를 확인했는데 해가 쨍쨍하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지던 것이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남편과는 달리 우기도 아닌데 왜? 라며 예보를 믿고 일정을 계획한 나는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짜증에 기름을 부은 건 바로 습도였다. 여름 나라니까 습도가 높은 것은 당연한 건데, 모든 것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보며, 디저트가게에 도착했다. 심지어 오픈시간이 지났는데도 오픈을 하지 않은 것. 앞에 적힌 문구를 보니 오픈시간이 바뀐 것이다. 장기적인 건지 일시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10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듣고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음식이 나와 먹는 내리 내 얼굴에는 심통이 가득 차있었다. 말도 없고 음식도 대충 먹는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은 결국 화가 났고, 나에게 도대체 왜 그러냐는 말을 했다. 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 상태로 먹다 말고 가게에서 호텔까지 걸어갔다. 호텔에 들어와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뒤따라 들어왔다. 호텔 안에서 우리는 다퉜고 나는 비행기표를 바꿔서 혼자 한국에 갈 거라고 말을 했다. 따로 가자고, 더 있기도 싫다고. 이 말은 큰 불씨가 되어 화해의 길에서 더 멀어지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화를 하다 말고 남편은 혼자 밖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화가 난 채로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을 서로 떨어져 있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에는 내리던 비가 그쳤고, 내 마음도 누그러져 갔다. 그러던 중 점점 시간을 버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또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 감정이 다 해소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점점 감정적으로 지쳐갈 때쯤,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편의 얼굴은 밝은 표정이었고, 손에는 작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체하려는데, 웃으며 나에게 다정한 말투로 "당신 좋아할 것 같아서 사 왔어" 하고 봉지를 주는 것이었다. 열어보니 작은 마그넷이 들어있었다. 마그넷을 보고 남편을 봤는데 "미안해"라고 말하는 남편. 그 모습에 주책맞은 눈물을 또 흘렸다. 나도 미안해라고 말을 하고 조용히 자세히 대화한 후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먼저 사과했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남편이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비가 와서 계획이 틀어졌다는 이유로, 비가 와서 습하다는 이유로, 가게 오픈시간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이 한 시간 반을 버릴 만큼의 사유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말처럼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지독한 계획형 인간은 상황을 악화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비가 내릴 수도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지사 한 일인데 왜 이토록 짜증이 났던 걸까 생각해 보면 완벽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내가 정하고 만든 플랜이 흐트러지지 않고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흐름이 깨져버려서 심통이 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내가 만든 플랜이 완성되어 얻을 수 있는 행복보다, 플랜이 깨졌어도 앞에 놓인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면 그것 또한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얻을 수 있었던 더 큰 행복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남편이 말했다. 계획도 좋지만 계획하며 알게 되는 정보들이 스스로를 옭아맬 때가 있다고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움직여보자고, 계획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을 알게 될 거라고. 이 일 이후로 계획하는 습관을 조금은 내려놓았다. 지나고 보니 남편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계획에서 오는 안전함도 좋지만 즉흥에서 오는 즐거움도 꽤 좋다. 즉흥이라는 것은 실패도 맛보게 하지만, 실패로 인한 깨달음도 같이 온다. 그리고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모든 것을 계획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계획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여나 계획이 틀어져도 "그럴 수 있지"라는 단어를 새기며 다르게 채워질 행복을 고대한다. 나에게 웃으며 건넸던 마그넷. 다툰 상황에서 비까지 오는데 나가서 오롯이 나를 생각하며 마그넷을 사 오던 그 과정이 눈에 선하여 고마운 마음이 안들 수가 없었다.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보다 더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던 건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내가 진짜 비행기표를 바꿔서 한국에 갔다면 이런 소중한 추억도 없었겠지.
지독한 계획형 인간의 모습이 사진으로 너무 잘 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