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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Sep 11. 2023

푸른 바다의 뜻

유서를 쓰고 나서부터 새로운 길을 찾았다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다. 지리산 자락 한 뼘 아래 어느 산골에서 자란 나는 파란 바다를 꿈꿨다. 지금이나 그때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여성 해기사라는 휘장을 달고 싶었다. 너는 여자애가 마도로스가 되려고 하니? 같은 말을 들으면 괜히 조금 우쭐했던 때도 있었다. 대단한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이 된 기분은 나를 으쓱하게 했다. 아쉽게도 좌충우돌과 역경 없이, 어렵지 않게 해기사를 양성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제복을 입고 승선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위한 여정 또한 첫 날을 빼고 대체로 무난했다.


하지만 정말 첫날에는 도망치고 싶었다.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몰라, 승선생활관에 누워있던 내 귀 안에 악마 같은 속삭임이 울려댔다. 겨우 나를 달래놓고 나니 4년이라는 대학과정은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흘러갔다. 별에 별일이 다 있었다. 하도 별나서 이야기하다 닳아버리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색다른 추억들이 많았다. 매일 6시 반에 일어나고, 위생 점검을 받고, 동기가 잘못해서 교내 기합을 열 몇바퀴 돈 것쯤이야 특별나게 느껴지지도 않는 보통의 순간들이었다. 한 시간 훈련 받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았다.


특이하게 그보다도 나는 “손 털지마” 이 말을 듣는 순간이 가장 미웠다.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훈련을 받아야 할 때가 많았다. 단체 생활이란 그런 거니까. 훈련을 할 때면 푸쉬업은 기본이나 다름없다. 나는 푸쉬업에는 소질이 없어 엎드려 뻗쳐 자세로 뻐팅기다가 일어났다. 하지 못하는 푸쉬업보다도 견디기 힘든건 손바닥이었다.  우둘투둘한 모래가 먼지와 함께 잔뜩 묻어 있는 걸 털어내지 못하면 거북해졌다. 눈을 피해 손을 옴지락 거려 먼지를 털어내고 있으려면, 그런 모래와 먼지 같이 삭막하고 조금은 따가운 나의 청춘이 서글펐다.


‘바다를 꿈꿨다’ 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반짝반짝 빛을 내는 꿈은 아니었다. 탐험과 미지의 세계를 거침없이 탐구하는 대단한 모험가를 위한 꿈은 아니었다. 현 시대의 마도로스는 실무에 뛰어들 수 있는 기술들을 배웠다. 항해를 배우면 대학에서는 공학사를 내주었다.


항해에 대한 환상을 품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모험보다는 조작과 운영에 가까운 게 내가 배운 항해였다. 나는 학교에서 항해하는 법을 배웠다. 거기에 더해 배 안에서 어우러지고, 또 언젠가는 하나의 선박을 이끌어 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질 같은 것들도 배웠다. 모나서는 안 되었고, 쓴 소리를 참아야 했으며, 가끔은 바짝 엎드리는 법도 배워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어느새 빠릿빠릿하게 각을 맞추고 있는 걸 느꼈다. 뾰족하고 딱딱하게 어떤 틀 안에 굳어져가는 청춘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의 젊음이 아무런 색도 띄지 않는 것 같아 울적할 때도 있었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을 돌아보니 그처럼 선명할 수 없는 바다의 빛깔이었다. 분명한 푸른색이었다. 들떠서 알아채지 못했을 뿐 속수무책으로 파랑 안에 빨려 들던 날들이었다. 졸업이 다가올 수록 나는, 우리는, 실무와 가까운 것들을 실습하고 배웠다. 퇴선할 때 안전하게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갑판 위에서 바다로 낙하하는 법도 훈련 했다. 제대로 막지 못한 눈과 코, 입에 바닷물이 스며들어 혼미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학문은 가끔 그렇게 매큼하고 짭짤했다.


안전핀을 뽑아 놓은 소화기를 어떤 친구가 눌렀던 날도 있었다. 그 바람에 교육받고 있던 모두가 소화기 가루를 뒤집어 쓸뻔했다. 운동장 구령대 위에서 계단을 잽싸게 내려가던 파안대소의 얼굴들, 그 뒤로 뿌옇고 하얗게 펼쳐진 배경이 지금 떠올려보면 꼭 부서진 햇살 같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웃었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그 때를 떠올리면 깔깔 거리는 소리가 꼭 배경음악처럼 깔리곤 한다.


행복은 바로 그때에 있었다.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에게 가지 말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진짜 바다로 가는 일은 미루고 그 시절 안에서 조금 더 웃고 싶었다. 바다는 내편 같았고, 그런 든든함 덕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다.



대양을 누비는 마도로스의 여정은 어느 순간에 일단락이 됐다. 한순간의 치기였다. 재수강과 계절학기도 마다하지 않으며 채워둔 학점과 토익점수로 갈 수 있는 실습자리가 없었다. 나보다 학점도 낮고, 토익점수도 낮은 남자애들은 내게 간절했던 회사에 아무런 감흥없이 들어갔다. 모래바람을 삼킨 듯 입안이 자꾸 텁텁했다. 메마른 부스러기들을 퉤퉤 뱉으며 나는 그냥 공무원이 될래 선언했다. 큰 포부를 가지고 들어간 곳에서 안정적인 삶으로 향해가는 변침점이었다. 특수한 종류의 삶으로부터 보편한 인생으로의 진입 지점에서 한동안은 가만 서있기도 했다. 이게 그토록 내가 바라고 그려왔던 삶의 풍경이었나 싶은 마음에.


선택지에도 없던 공무원을 어렵지 않게 이루었다. 바닷일을 하는 사람에게 해양경찰청에 입사하는 건 나름 평범한 선택이었다. 제 버릇을 남 못주고 어쩌다 배를 타고 있었다. 경찰직이 아닌 그저 9급 공무원이었는데 어느새 보니 나는 함정을 타는 공무원이 되어있었다.


바다 위의 경찰은 출동, 비상, 사고, 훈련 같은 단어들이 익숙했다. 사고가 나면 눈곱도 채 떼지 못한 채 닻을 거두어 올렸다. 그리고 휘적휘적 덜 깬 잠을 깨우기 위해 계단 옆 벽을 짚어가며 조타실에 올라갔다. 간혹 파도의 물결이 무자비할 때면 앉아있는 의자가 옆으로 갸우뚱 반구배를 넘나들었다. 험한 바다 날씨를 견뎌가며 나는 바다에 쏟아진 기름을 닦으러 가거나, 먼 바다에 전복되어 있는 배를 향해 가거나, 불이 난 배를 진화하러 가거나,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을 찾으러 가거나 했다.


대형 해양 사고는 간혹 가다 있었고, 대교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을 찾는 일은 잦았다. 동동 떠있는 배 위에서 물결과 함께 떠돌고 있을 영혼들을 떠올리며 의구심을 품었다. 죽음 위를 점차 늘어가는 시간과 함께 누비면서 순진한 질문을 던졌다.


‘생의 어느 고비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던 가요?’

‘그렇게나 힘든 삶인 건가요?’

‘삶은 그리 고되고 힘들기만 한 것 인가요?’

들을 수 없는 답을 기다리다 종국에

‘당신의 마지막은 매콤했나요? 아니면 짭짤했나요?’


같은 질문까지 떠올리다보면 내게 주어진 의무 시간은 끝이 났다. 우습게도 나는 죽음을 베고 누워 단잠을 잤다. 같잖게도 가뿐하게 일어나던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나면서 내 세계에는 어떤 파동이 생겼다. 파동은 모여 물살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생을 향한 기민함이 뭉툭해졌다. 사람이 그저 일로만 보였다. 파랑에 두들겨 맞은 듯 어딘가 욱신거렸다. 어쩌면 파랑이 아닌지도 몰랐다. 정신차려보니 온통 칙칙한 잿빛과 회갈색으로 덮힌 좁은 방 안에 갇혀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얌전한 걸 보면 자주 눈물이 났다. 바다의 세계는 그리 고요한 법이 없는 터라 덕분에 나는 그저 열렬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나약함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란 걸 알았다. 어린 감정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강하고 굳세보이기 위해 흘려내지 못한 울음들은 어딘가로 모였다. 아슬한 방울들이 기어코 마음 안에 맺혀 따끔거릴 때쯤부터 바다에서 땅을 꿈꿨다. 땅위의 번듯한 기운보다도 그저 바다는 이제 내 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다와 완전하게 안녕을 선언하고 한동안은 바다가 미워 잊고 싶었다. 그 위에서 짓던 웃음, 품던 긴장, 삭힌 열정, 삼킨 눈물 따위들을 모른채 하고 싶었다. 나는 바다가 가지고 놀다 버린 장난감 같았다. 버림 받은 줄 알던 내게 바다는 자꾸 장난질을 쳤다. 항로, 변침점, 안항제 같은 단어들에 붙잡혔다. 배운게 도둑질이라 바닷일에 문장을 빼앗겼다. 어쩔 수 없이 바다가 아닌 세상에서 바다를 다시 보게 됐다. 한참을 새로이 보다가, 진짜 나의 꿈을 위해 나를 가득 안아준 바다의 마음이 있었음을 알아챘다.


바다는 생과 가까웠다. 그래서 생을 이어지게도 하고, 한순간에 끊어내기도 했다. 바다의 현장에서 나는 고스란히 그 역동을 겪어냈다. 내게 닥친 느닷없음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급작스러운 사고에, 준비되지 못한 채로 굳어져버린 주검을 맞이해야했던 날이 있었다. 생의 마지막은 그 공간을 허물어버릴 듯 무너져 내리는 울음 소리와 함께 밀려왔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이의 죽음이 그렇게 가까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온 경찰서의 직원들이 뜬 눈으로 며칠을 지새웠다. 버석한 얼굴로 힘을 내려 애써 웃어보이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지고 있는 힘을 쥐어짜 각자의 보고서 위로 쏟아내고 애먼 의자에 앉아 풀어져 있었다. 모두의 신경이 곤두서서 먼 바다를 향했다. 몇날 며칠 그 광경들을 바라보며 바다가 품은 생이 뭔지 따지고 싶었다.


배 위에 있을 때는 큰 불을 끄러 가는 일이 잦았다. 내가 탔던 배의 소화능력이 특별히 출중했던 덕이었다. 빠끔빠끔 빨간 화염을 뱉어내는 배에 바짝 붙어 거품이나 물따위를 쏘아댈때면, 열을 내고 있는 죽음의 숨결이 느껴졌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선박들 옆에서 유독한 가스를 전부 뒤집어 쓰던 날들이었다.


그래서 몇 살부터 였던가, 아마 스물 여섯부터였던 것 같다. 삶을 끝내기엔 너무 아까운 그런 나이부터 나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맹렬히 죽음을 쫓았다기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 앞에 힘 없이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허탈하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대비하고 보니 먼 미래는 아득해졌다. 당장 다음 출동 때 죽음을 향하게 될지 모를 일이라면 주어진 날에 최선을 다해야했다.


파랗고 또 파랗던 바다 위에서 몇 계절을 보냈다. 더이상 바다에서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바다를 뒤로한 채 모험을 떠났다. 만들어진 차트 위에 항로를 그어놓고 선박 기관의 힘을 빌려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길 위에서 내 두발로 걷고 싶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를 거란 마음이 내 모험 길에 동행하면서 인생은 180도로 뒤집어졌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을지, 어떤 하루를 보내야 후회가 없을지, 당장 내일 세상과 안녕하게 된다면 어떤 가치와 발자취를 내 인생에 남기고 갈지, 모든 결정의 앞에서 죽음은 나를 이끌었다.



그 힘에 이끌려 나는 글을 쓰게 됐다. 나는 나를 ‘가슴 뛰는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은 글을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웃게 하고, 때로는 울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꿈이 밥 먹여 주지 못할 것이, 꿈을 원망하며 무너질 내가 걱정스러워서, 꿈인지도 모르고 흘려보낸 것을 이제는 다시 꽉 붙잡게 됐다. 바다의 마음 덕에 알게 됐다. 밥 먹여주는 것보다 나의 지금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이 생을 어떻게 지지해주는지를.



이제는 살붙이고 살던 바다가 가뭇거린다. 코끝을 맴돌던 비릿한 내음이 흐려진다. 귀를 간지럽히던 파도를 갈라 만든 물보라가 밭아진다.


평화로운 바다의 수호자 고래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바다 위에서 배운 것들은 여전히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고 있다. 이제는 세상이 만든 마음 속의 파도를 고요하게 만들어 보려 한다. 바다가 아닌 마음의 평화를 수호하고 싶어졌지만, 결국 넓은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건 너른 바다의 마음 탓이다.


봄뜻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게 다시 찾아온 청춘처럼 봄이오는 기운을 뜻하는 낱말이다. 흘려보낸 줄만 알았던 청춘을 요즘은 다시 꺼내보고 있다. 총총히 빛나는 청춘의 안에 다시 들어왔음을 생생하게 느낀다. 고맙게도 나에게는 봄뜻을 맞이하기 위한 푸른 바다의 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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