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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이 Jun 23. 2023

언젠가 너로 인해

반려동물을 들인다는 건, 헤어짐을 각오하는 것

요즘 부쩍 본가를 방문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나를 보고 싶어하는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본가에 들렀다가 올라오는 길에 엄마가 사진을 보내줬다. 내가 떠난 침대에서 기운 없이 웅크려 있는 내 강아지, 꼬미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데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절대 반려동물을 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다짐이나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내 삶에 꼬미가 끼어들게 된 것은 전혀 계획에 없던 교통사고와 비슷한 일이었다. 뜬금없이 동생이 이사를 도와달라고 연락했고, 왜 기숙사가 아니라 오피스텔을 굳이 고집하냐는 내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사실은 개를 키우고 있다고 털어놓았을 때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신중한 계획 없이 덜컥 반려동물을 입양한 것에 대해 동생한테 폭풍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작은 친구는 동생의 가족, 그러니까 나의 가족이 되어버렸고, 가끔씩 동생이 일 때문에 집을 비우거나 여행을 가야할 때면 내가 대신 동생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면서 봐주곤 했다. 처음 현관 문을 열었을 때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펄쩍펄쩍 뛰며 날 반기던 그 녀석은, 어쩌면 내가 가족임을 바로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은 가끔 꼬미를 데려온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니까 신중했어야지!"라고 면박을 주려다가, 이미 후회한다는데 뭐… 싶어서 그냥 "알면 됐다." 하고 말았다. 어디 다른 데 보내려 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사실 동생은 반려동물을 키우기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는지라 거처가 불안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전화가 왔다. 한 달 동안 집을 떠나 있게 되었는데, 혹시 그동안 꼬미를 키워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간 간헐적으로 꼬미와 시간을 보내며 강아지를 예뻐하기만 하는 것과 키우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나는 다른 생명체를 돌보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이 한 달 동안 꼬미를 내가 아닌 다른 친구한테 맡긴다면 다시 꼬미를 되찾아 올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없다고 했다. 이기적이지만, 본인이 키우기 버거운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꼬미를 아예 남에게 보내긴 싫다고 했다. 나 역시 꼬미를 앞으로 영영 못 보는 건 싫었기에 내가 맡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팔자에도 없던 애견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혼자 사는 게 너무 익숙해진 나에게 한낱 동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생명체와의 동거는 생각보다 큰 일상의 변화를 가져 왔다. 나는 늘 무기력하게 누워있거나 혼자 사부작사부작 노는 게 일상이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자유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동거견은 내가 혼자 무언가를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내 관심을 갈구했다.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가 강아지를 보면 제일 신기해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하나도 없지?'라고 하던데, 내가 이 녀석을 보며 느낀 것도 그러했다. 혼자 취미를 잘 못 즐기는 게 고민이었는데, 여가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에 고민이 사라졌다. '회사->쉬다 잠들기' 이렇게 단순한 구조였던 내 일상은 '회사->퇴근 후 산책 및 놀아주기->지쳐 잠들기' 이런 형태로 변모했다. 육아를 하는 부모들의 고충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을 향한 마음이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은 생명체는 너무나도 가엾고 소중했다. 이 아이의 세상에는 내가 전부라는 책임감,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데서 느껴지는 충만함, 감사함. 반려동물이라는 게 이렇게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인 줄 몰랐다. 같은 종이면 다 똑같이 생긴 대체 가능한 개체들인줄 알았는데, 외양도 습성도 나와 쌓아가는 생활 방식도 전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고유한 개체였다. 조용히 동그란 두 눈을 마주하고 있자면,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꼬미와 함께 지내던 시기를 떠올리면 눈에 선한 감각들이 있다. 침대 곁에서 느껴지는 포근하고도 묵직한 온기, 놀아달라고 설치는 탓에 배를 짓밟혀 악 소리 내며 눈 뜨던 아침, 얼굴을 핥아대던 말랑한 혓바닥의 감촉,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울에 비친 모습,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닫히는 현관문을 끝까지 지켜보는 모습,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흔들며 거의 내 키만큼 방방 뛰어오르던 모습, 그런 녀석을 보기 위해 달리던 퇴근길의 설레는 기분. 집에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이렇게 애틋하고 행복한 건 줄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녀석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항상 미안했다. 야근이 많아서 기본적으로 하루 12시간 이상 혼자 집에 방치해둬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피곤해서 열심히 놀아줄 여력이 없었다. 앉아서 대충 놀아주다 30분 산책 다녀오고는 더 놀자고 보채는 녀석을 뒤로 하고 나는 잠 잘 준비를 해야 했다. 활동량이 부족한지 불이 꺼진 방안에서 돌아다니는 녀석의 기척을 느끼며, 12시간 기다림의 대가가 너무 부족해서 미안하다는 죄책감에 쉽사리 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이 터져서 거의 밤 12시가 다 되어서 퇴근하게 되었다. 그날은 내게도 유독 힘든 날이었는데, 집에서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고 있을 꼬미를 생각하니 더더욱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헐레벌떡 뛰어서 퇴근하는데,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꼬미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벌컥 문을 열자, 늘 그랬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뛰어드는 꼬미가 보였다. 꼬미가 보이자마자 회사에서부터 욱여담았던 서러움이 미안한 마음과 함께 터져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유독 늦는 날이면 더욱 더 반가워서 달려들던 녀석이었는데, 내가 우니까 당황했는지 몇 번 치대다가 어느 새 구석에 가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게 더 미안했다. 하루종일 애타게 기다린 내가 놀아주지 않고 울기만 해서. 그즈음 동생이 계속 키울 의향 있냐고 물어왔었고, 나는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했었다. 그 다음 날, 나는 도저히 더 이상 못 키우겠다는 카톡을 보냈고 꼬미는 엄마가 하루종일 집에 머무는 본가로 보내기로 했다.


꼬미를 본가에 아주 데려다놓으려고 짐을 챙기면서 혹시 엄마가 못 키우겠다고 할 때를 대비해서 물건을 조금은 남겨뒀다. 하지만 생각보다 엄마는 꼬미를 무척 예뻐했고, 내가 늦잠 자는 동안 두 번이나 꼬미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다녀왔다. 그 모습을 보자 이곳이 꼬미에겐 천국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는 여기서 엄마랑 산책 실컷 하면서 살아. 나는 다시 내 일상을 찾을게.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꼬미가 그래도 나랑 살고 싶어하면 어떡하지, 말 못하는 짐승이라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데. 혹시 떠나는 나를 계속 따라오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꼬미는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엄마와 함께 나를 배웅했다. 고속도로를 타기 전까지 수십 번 다시 핸들을 돌릴지 말지 고민했다. 당장 다시 돌아가서 내가 키우겠다고 데려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아침에 출근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라서 다시 핸들을 다잡았다.


운전하는 동안은 오직 생각 외에 다른 건 할 수 없다. 3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꼬미 생각 뿐이었다. 꼬미를 본가에 보내기로 결정한 건 나였지만, 그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건 내 환경이었다. 혼자 살기 때문에 반려동물이 더 각별했는데, 혼자 살기 때문에 키울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집에 오랫동안 혼자 방치해두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전부 꼬미한테 바치면 되지 않을까? 아침에도 산책 시키고, 일하는 중간에도 한 번은 집에 와서 보고, 최대한 일찍 퇴근해서 놀아주고… 그렇게 내 삶의 중심을 꼬미로 삼으면 다시 데려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자꾸 비죽비죽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자 꼬미의 물건들이 사라진 집이 텅 빈 듯 했다. 이 공허한 공간에서 어디서 무엇을 해야할 지 막막했다. 나는 그새 혼자 있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제 진짜 혼자라는 게 실감나서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애써 꾹 참던 울음이 터졌다.


그 뒤 한 이 주 정도는 끊임없는 내적갈등의 반복이었다.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선택지를 고르듯이 한 순간 한 순간 돌아서면 다시 데려올까, 말까, 반복. 심지어는 또다른 강아지나 고양이를 데려올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행복한 상태인 꼬미를 다시 데려오는 건 꼬미한테 너무 미안할 짓이지만, 안락사 직전의 유기견이라면 바쁜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죽는 것보다는 행복하지 않을까. 구차하고 치졸하지만, 그 때의 나는 꼬미의 공백을 메우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어디에서 의미를 얻고 무엇을 목표로 하며 살아야 할 지 막막했다. 그런 온갖 고민 끝에 두고 온 지 한 달이 좀 덜 됐을 무렵, 결국 다시 꼬미를 데려오고 싶다고 엄마 아빠한테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꼬미와 함께 지낸 한 달 동안 든 정을 꼬미와 헤어지고 한 달 뒤에도 떼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덜컥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일 년, 이 년, 십 년을 꼬미와 함께 한다면, 높은 확률로 나보다 수명이 짧은 꼬미가 먼저 떠나게 될텐데 그 때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진작에 내가 반려동물을 키울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천성이 게을러서 나 혼자 살기도 충분히 벅 것도 맞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나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을 주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꼬미가 내 인생에 깊게 들어온 것은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한 여름 밤의 꿈 같던 그 한 달이 내게만 각별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나와 함께 지낸 시간보다 엄마와 함께 지낸 시간이 더 길지만, 가끔 집에 내려가면 꼬미는 내 곁에만 찰싹 붙어 있는다. 심지어는 나 없이는 산책조차 가지 않으려 한다. 꼬미의 원래 주인이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동생이 나타나도 나만 쫓아다니는 걸 보면 분명 나를 가장 좋아하는 게 맞다고 가족들이 입을 모은다. 그런 녀석이 기특하다가도, 멀리 사는 나를 향한 기약 없는 짝사랑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그저 안쓰럽다. 꼬미가 말을 할 수 있어서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꼬미는 엄마와 계속 살 것이다. 그게 우리의 최선이고 본인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꼬미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꼬미를 쓰다듬으며 엄마한테 말했다. 나는 꼬미를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꼬미가 나보다 빨리 죽을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슬프다고. 엄마는 본래 주인도 아닌 내가 이렇게 꼬미를 아끼는 줄 몰랐던 듯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네 마음 속에 꼬미가 있어서 그래, 살아있는 동안 잘 해주면 되지", 같은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자주자주 내려와서 얼굴 많이 보여주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엄마가 보내준 사진을 보면 꼬미는 내가 왔다가 떠날 때마다 상실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럼 차라리 얼굴을 최대한 안 비춰주는 게 꼬미를 위한 게 아닐까..? 강아지 언어를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 역시 당장 또 보고싶어서 다시 달려가고 싶은 걸 보면, 분리불안은 나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매 헤어짐이 애틋한데, 진짜로 얘가 세상을 떠나면 나는 어떻게 그 슬픔을 버틸 수 있을까.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에게 어떻게 동물을 키울 용기를 냈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나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노래 하나를 추천해주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알아 왠지는 몰라 그냥 알아

언젠가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너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가지만

약속해 어느 날 너 눈 감을 때 네 곁에 있을게 지금처럼

그래 난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보다 많이 행복할 거라는 걸 알아

궁금한 듯 나를 보는 널 꼭 안으며

난 그런 생각을 했어


가을방학 - <언젠가 너로 인해>




나는 이별이 무서워서 자꾸 이별을 곱씹는다. 언젠가 내가 슬플 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매 순간 이별을 준비하는 것 같다. 너를 너무 사랑하는 나를 알기 때문에 무의식 중 발현되는 방어기제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할 수 있도록 후회없이 사랑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언젠가 우리의 마지막이 왔을 때, 네가 나로 인해 행복했을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털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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