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나기, 과거로부터
그리고 나라고 믿고 있던 것들로부터
얼마 전 차를 샀다. 딱히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고민 끝에 그냥 사버렸다. 그리고는 합리화했다. 그래, 나는 차를 산 게 아니야. 차가 있는 스물여섯 살의 삶을 산 거야. 긁힌 범퍼와 카드값을 보며 후회스러운 때마다 되뇌었다. 차가 있기에 도움 되는 일들이 있을 거야. 뜻밖에도 그중 하나가 동생 자취방 이사였다.
이사를 도와주게 된 것은, 내가 차 샀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이 도와달라고 연락해 온 탓이었다. 동생의 연락은 다소 의외였다. 한 살 터울 남동생과 나는 여느 남매들처럼 안 친했기 때문이다. 아니, 서로의 존재를 잊은 채 살고 있었다는 말이 좀 더 맞겠다. 그렇지만 나는 내 돈 먹는 작은 하마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기에, 그리고 혼자 타지에 나와 생활하는 처지로서 동질감이 들었기에 흔쾌히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덜컥 걱정이 되었다. 어색하면 어떡하지? 단 둘이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그렇지만 나는 언젠가 동생과 솔직하게 얘기해보고 싶었다. 동생이 우리 가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다. 이 땅에 혼자 태어난 양 가족과 교류를 거의 끊다시피 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동생은 타지에 나가 살면서도 엄마, 아빠, 할머니한테까지 꾸준히 전화를 하곤 했다. 내가 동생이라면 엄마랑 진작 연락 끊었을 텐데, 그래도 가족이라고 잘 챙기는 걸 보니 기특했다. 나한테 이번에 연락한 것도 결과적으로 몇 년 만에 함께 밥 먹을 기회가 되었으니 고마웠다.
우당탕탕 이사를 마치고, 동생이 가족 톡방에 이사 잘 끝났다고 올리자 바로 엄마가 수고했다는 살가운 답장을 보내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고된 하루를 보내느라 유대감도 생겼겠다, 치익 익어가는 삼겹살을 두고 마주 앉아 있으니 어떤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철없는 소리를 해보았다. "그래도 네가 진짜 착한 거 같다, 내가 너라면 엄마 이렇게 못 대했을 거 같은데." 그러자 동생이 씨익 웃었다. "누나가 보기에도 솔직히 학대였지?" 하며.
우리가 늘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은 떠올리기에 딱히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의 편애를 받았고, 그에 비하면 문제아였던 동생은 엄마의 미움을 받았다. 동생과 엄마의 전쟁에 집안 분위기는 항상 살벌했고 큰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혹독하게 혼나는 동생을 보면서, 나는 그냥 방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나대로 그런 환경이 스트레스였고, 동생까지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도망치듯 기숙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는 집과 거리를 두었다. 완전한 방관자가 된 것이다. 어쩌면 동생은 그런 나도 미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가끔 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동생과 솔직하게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때 받았을 상처 때문에 두고두고 힘들진 않았을지, 엄마랑 싸웠던 버릇 때문에 성격이 괴팍해 건 아닌지, 외롭지는 않은지, 잘 살고 있는지. 소주잔을 맞댈 나이가 되어서야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런 내 걱정에 동생은 손사래를 쳤다.
“누나, 내가 어릴 때 많이 혼나고 맞았긴 했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내 성격이 이상해졌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건 그냥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의 나랑은 상관없지. 굳이 연결 지을 게 있나. 난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말 밖에 안 듣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보기에 오히려 상처받은 건 나 같다며, 너무 엄마를 원망하지는 말라고 했다.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지난 일에 얽매여 있었는데, 동생은 진작 벗어나 있었다.
나는 과거를 중요하게 여겼다. 사람을 이루는 것은 경험과 기억이며, 삶이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들이 축적되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었고, 우리는 그렇게 시간축을 따라 조금씩 연속적으로 쌓여가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지난날들이 하나하나 각별했고, 내가 아끼는 타인들의 과거가 항상 궁금했다. 그들이 살아온 삶에서 지금의 그들을 이해하려 했고, 그들 행동의 인과관계와 서사를 찾으려 했다. 내 나름대로의 이해와 관용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해와 오해는 한 끗 차이다. 한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깊게 고찰해 볼 기회가 주어졌고, 그 과정에서 가끔씩 어릴 때의 경험이 내 성격에 미친 영향을 발견하곤 했다. 어쩌면 굳이 인과관계를 찾으려 한 것도 같다. 그러면 못내 서글퍼졌지만, 한편으로는 체념할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수 없는 거고, 이미 이렇게 형성된 나라는 사람도 그냥 이렇게 쭉 살아갈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에게 제한을 걸었다. 나는 원래부터 낯 가려서 말을 먼저 못 거는 사람이고, 연락을 먼저 안 하는 사람이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고, 모든 일을 귀찮아하는 사람이야. 지금껏 쭉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아마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이후에야, 진정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타인에게 들이대기도 했다. 나는 사람이 쉽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의 악의 없는 행동이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을 때, 솔직히 털어놓고 맞춰나가기보다는 혼자 삭히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한 번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은 애초에 그렇게 형성된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든 탑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 힘들 듯, 이미 십수 년을 살아온 방식을 단지 내가 기분 나쁘다고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쌓아만 두다가, 못 견딜 정도가 되면 그냥 포기했다. 안 맞는다고 느낀다면 서로 맞추려 애쓰기보다 각자 갈 길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멋대로 판단하고 벽을 세웠다.
결국 얼마 전 이 오만함이 터졌다. 인간관계에서 솔직함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다. 가식 없이 듣기 싫은 얘기도 할 수 있어야 건강한 우정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는 굳이 불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은, 듣는 상대의 기분보다 그걸 말하고 싶은 본인의 욕망이 우선인 무례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 친구 나름의 우정이자 신념일 테니, 상처받을 때마다 그냥 조금씩 그 친구와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기해 갔다. 그러던 어느 지친 날, 그 친구가 악의 없이 내뱉은 솔직한 표현이 유난히 서럽게 느껴졌고, 그날따라 혼자 삭이기 힘들었던 나는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사실 너의 그런 말에 기분 나빴던 적이 많았다고. 나는 지나친 솔직함보다 배려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 친구도 우리의 차이를 덤덤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 친구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네가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 말에, 그 친구는 펑펑 울었다. 내가 그렇게 느낄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고치겠다고,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노력하겠으니 기분 나쁜 일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깨달았다. 진작 말했으면 내가 기분 나쁠 일도, 내가 기분 나빴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친구가 이렇게나 속상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친구는 나를 속상하게 하는 대신 변하려고 노력할 사람이었는데, 나는 변화를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못 믿었다. 그 친구의 태도도, 우리의 관계도 얼마든지 노력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건데, 나는 항상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미래만 그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도 이끼와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다 보니 어느새 다들 각자의 방식이 정해져서, 그 선 안에서의 비슷한 생활만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끼와 다른 점은 순전히 본인의 의지로 관성을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이후 평생을 그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게 아니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을 당연한 권리인 양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의 ‘원래’가 말하는 시점이 과연 어디인지, 얼마나 대단하고 견고한 정체성인 건지 의아하다.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미 지나간 자신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다. 과거의 일이 나한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일어난 일을 아쉬워해봤자 변하는 건 없고, 계속 똑같이 살 필요도 없고, 앞으로의 나는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어제까지의 나와 오늘의 내가 연속적인 존재라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단지 이해하는 데에만 그치고, 스스로에게 프레임을 씌워서 경험과 생각과 시도를 제한하지는 말아야겠다.
동생을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또 오겠다고 인사했다. 동생이 올 때마다 밥을 사 줄 테니 자주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늘 동생이랑 안 친하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이제는 친해질 것 같다. 차를 산 덕분이다. 아니, 지금까지의 서먹하던 과거를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씩 벗어날 수 있기를. 그래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2020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