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외운 것들은 평생 잊히지 않기도 한다. 아빠의 차 번호가 그랬고, 좋아하던 만화의 오프닝이 그랬고, 성경의 몇 구절이 그랬다. 특히 몇 십 번이나 되읊은 시편 23편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어렸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다녔던 교회는 전 교인 수가 100명은 될까 말까 한 작은 마을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는 으레 작은 교회들이 그렇듯 특별한 날마다 소소한 행사를 진행하곤 했다. 그중 하나가 성경 암송 대회였다. 나는 항상 그 대회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었는데, 그때 자주 외웠던 구절이 바로 시편 23편이었다. 이 시를 지은 자는 ‘다윗과 골리앗’으로 익히 알려진 작은 소년 다윗으로, 그는 이 시를 통해 하나님이 평생 자신의 편일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을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이 구절을 읊을 때면 어렸던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 충만해지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신실했고, 항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빠가 구원받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을 못마땅히 여기는 아빠에게 단호하게 “우리 아빠는 하나님이야”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어제 읽던 성경책을 마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신나서 집까지 뛰어간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짐작이나 했을까. 15년이 지난 지금, 그 거룩했던 어린양이 “나는 교회가 싫어요” 외치고 다닌다는 것을.
내가 교회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비단 내 머리가 커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믿음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름 견고하다고 자신했던 믿음은 어쩌다 생겨버린 균열을 메울 만큼 맹목적이진 못했다. 내가 의문을 제기했을 때, 사람들은 그냥 믿으라 했다. 의심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그런 지엽적인 것에 휘둘리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성경은 완전하고 무결해야 할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구석이 있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나는 더 이상 눈을 가리고 오롯이 믿기만 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의심은 성경 그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읽는 성경을 펴낸 자들에 대한 의심이었다.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되짚어보니 시기상 개역개정 4판이 나왔을 때였던 것 같다. 아무튼 기억나는 건 성경이 한 번 개정되었고, 엄마를 비롯한 우리 교회 사람들은 개정된 성경을 읽는 것을 반대했다. 새로 바뀌는 부분에 오류가 있다나. 그렇지만 얼마 뒤 옮긴 교회에서는 새로 개정된 성경을 썼다. 엄마는 새로운 교회 사람이 되면서 그토록 반대하던개정된 성경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내게는 의심이 뿌리내렸다. 성경이라는 게 내용이 바뀌기도 하는 것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천 년 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현재 한글로 인쇄되어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에 의구심이 생겼다. 엄마는 성경은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을 선지자들이 받아 적은 것이라 했다. 그들이 어딘가에 받아 적었을 말씀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구 하나 실수하거나 왜곡하지 않았다는 게 가능할까.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일 것이다.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이 기적은 신약의 네 복음서 전부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종교적 위치가 대단하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한 다큐멘터리에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번역 실수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오천 명을 먹인 게 아니라 다섯 천부장(천 명 군대를 이끄는 자)을 먹였을 거라는, 그 두 단어의 철자가 비슷하여 생긴 오류라는 가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의심하지 말고 그저 믿어야 했다. 만약 번역이 잘못된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행한 건지 아닌 지는 중요하지 않아. 하나님은 정말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다 보니 참, 그런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정식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내 의심을 북돋웠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보통 개신교 교회에서 얘기하는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전집이다. 나는 신실한 교인이라는 의무감에 성경을 두 번 완독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가령, 설교 시간에 목사님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하셨지만, 성경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의 최후는 ‘베드로 행전’이라는 정식 성경 66권에 포함되지 않는 외경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 정식 성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책들이라니, 그렇다면 정식 성경과 외경을 나누는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진 채택인지는 모르지만(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외경의 존재는 내게서의 성경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성경이 하나님이 빚어낸 유일하게 신성한 기록이 아니라, 여러 후보들 중 인간들의 합의로 선별된 것들의 모음이라는 사실에 나는 또 한 번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머지않아서였다. 살면서 순식간에 마음이 변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가끔 마주하게 되는데, 내 신앙이 꺾인 순간도 그중 하나이다. 바로 예배 시간에 다 같이 동성애를 부정하기 위해 기도했을 때, 나는 내가 믿던 하나님의 부재를 깨달았다.
내가 처음 동성애자의 존재를 안 건 중학생 때였다. 아마 사전적인 의미로는 그전부터 알고 있었을 테지만, 실제로 내 주변에도 존재할거란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고 동경했던 친구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좋아한다고 털어놓기 전까지는. 마냥 순수했을 때여서인지 그 친구들이 다 여자라는 건 내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조금 신기하긴 했으나 그보단 그 친구의 짝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응원했다. 어린 마음에, 그 친구한테 나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 질투가 났던 것도 같다.
지금도 인생작으로 제일 먼저 꼽곤 하는 웹툰 <어서오세요, 305호에>를 추천해 준 것도 그 친구였다. 그 작품을 추천받은 건 아마 그 친구의 성정체성을 알기 전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의 고백 이후, 그 친구가 내게 이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추천해 줬을지를 생각하며 다시 읽었다. 작 중 등장하는 성소수자 캐릭터 하나하나를 그 친구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혹시 동질감을 느끼곤 했을까. 그렇게 곱씹으며 그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내게 아픈 손가락이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을 타고나게 한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이왕 우리를 만드실 거면 행복하게 해 주시지. 생각해 보면 성경에는 이해하지 못할 것들 투성이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죄를 짓는 사람들, 진노하신 하나님, 그 뒤를 잇는 살육과 저주. 하나님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민족들은 무참히 쓸어버리셨다. 그들의 죄는 무엇이며, 대체 그들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 비정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고하셨다.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라’.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남자를 좋아하듯 여자를 좋아한다던 그 친구를 떠올렸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금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 지느러미가 없는 어류는 먹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 일을 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한다, 여자아이를 낳은 여자는 66일 간 부정하므로 집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이런 구약의 율법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생리하는 여자를 부정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성애 퍼포먼스를 하는 레이디가가의 내한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했다.
제 입맛대로 성경 구절을 취사선택하는 교회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교회 안 다니고 혼자 성경을 읽으면 안 되냐고 했다. 엄마는 성경은 상징과 비유가 가득하기에 잘못 해석할 우려가 있다며 만류했다. 그러면 교회에서 다른 구절 다 놔두고 유독 동성애만 반대하는 게 옳은 해석이냐고 물었다. 엄마는 기도하면 답을 주실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제가 빚고도 제가 부정하는 하나님의 뜻을 감히 이해하려 하는 내가 오만한 것일까. 하나님이, 혹은 사탄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일까. 기도 대신 의문만 꼬리를 물었고, 다시 읽은 성경 구절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구시대의 유물로 느껴졌다.
결국 나는 시험에 굴복했다. 관성으로 꾸역꾸역 교회를 다니면서, 거룩한듯 세속적인 교회 공동체에 환멸이 났다.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엄마는 몇 번 교회 나갈 것을 종용했으나 나는 곧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하였고, 더 이상 내 일상에 엄마가 관여하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기원인지 저주인지 모를 엄마의말에 나는 코웃음 쳤다. 그럼 지금 나에게 신앙을 주시면 되지, 왜 굳이 이렇게 방황하게 두신대. 대학 입학 후에는 캠퍼스에서 전도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워낙 많이 만난 덕분에 더더욱 한국 교회에 정이 떨어지고 말았다.그렇게 나는 엄마의 오랜 기도제목으로 남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흔적들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교회를 다니던 때 나는 황금빛 불상이 우상으로 느껴져서 절을 싫어했는데, 여전히 불경이나 불교 장식들이 께름칙하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에게 절을 하는 게 꺼려져서 기도로 대신한 적도 많다. 어린 시절 열심히 불렀던 복음성가들이 그리워 찾아들었다가, 그 시절의 향수에 잠깐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무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나 두려운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요즘은 그 빈자리가 유독 허전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 내 인생에 영향이 클 수도 있는 선택을 해야 했는데, 덜컥 겁이 나서 물러섰다. 그러고 나니 막막했다. 나는 너무 가진 게 없고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가득했다. 혼자 고민해서 결정해야 할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 결과를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게 무섭다. 다윗은 본인이 어떤 길을 가든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실 것을 믿고 의지했다. 자기를 죽이려는 적들을 피해 숨어 다니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보다, 고작 회사 일에 숨 막혀하는 내 미래가 더 막막할 것 같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끊임없이 불안해하다 보면 엄마의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이 예언처럼 느껴진다. 그저 기도하라는 엄마의 말이 답답했지만,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막막함도, 그저 기도함으로써 얻었을 안정감도 떠올리게 된다. 그게 종교의 효용이구나, 이제야 깨닫는다.
한때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바보들 같았다. 지금도 나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진짜 멍청한 건 알량한 지적우월감으로 안식처를 등진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요즘따라 자주 든다. 두려워하는 무엇이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게 감사한 일임을 느낀다. 머지않은 날에 방황하는 내 영혼도 안식처를 찾을 수 있기를.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