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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an 17. 2024

해돋이 공원에는 해먹이 있다

부제: 해먹날먹썰

내가 살고 있는 송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을 고르라면, 바로 해돋이 공원이다. 얼마 전 밤에 해돋이 공원을 혼자 뛰다가 문득 작년 10월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작년 10월은 날씨가 참 좋았다. 날씨가 좋으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곤 하는 나는 그 좋은 날씨를 만끽하느라 열심이었다.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자전거를 사서 송도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날도 그런 날씨 좋은 날들 중 하나였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저녁 일정까지 시간이 좀 뜬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해돋이 공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주말이라서인지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평소에 내 주변에서 듣기 힘든 아이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유유히 자전거로 공원을 가로지르며 그 평화롭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해먹존에 해먹 한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해돋이 공원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해먹이었다. 해돋이 공원 구석에는 해먹들이 여러 개 나무에 걸려있었는데, 지난봄 나는 거기서 종종 시간을 보냈다. 해먹에 누워있으면 자연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 들면서, 이래서 옛 조상들이 정자에서 자연의 풍류를 노래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다. 여름의 땡볕과 태풍을 겪는 동안 해먹들이 무사한지 종종 살펴봤었는데, 그 시기에는 해먹들을 철거하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아 슬퍼하던 참이었다. 가을이 되고 다시 찾은 공원에는 해먹들이 예전처럼 줄지어 늘어져있었고, 거기서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딱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날씨도 기분도 좋은 날, 바로 나를 위한 자리 같았다.


나는 그 단 한 자리를 뺏길세라 서둘러 근처에 자전거를 세우고 해먹으로 향했다. 해먹 옆에는 한 아저씨가 캠핑의자를 펼치고 앉아있었다. 뭐지? 쓰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렇게 가까이 앉아 계신담. 나는 마치 헬스장에서 쓰지도 않는 운동기구를 붙들고 있는 사람을 보듯이 그 아저씨를 흘깃 쳐다보고는 바로 신발을 벗고 냅다 해먹 위에 드러누웠다.


내 무게를 그대로 받치면서 내 몸의 형태대로 늘어진 해먹은 그 어느 침대보다 아늑했다. 가볍게 부는 시원한 바람, 맑고 푸른 하늘, 이어폰으로 들리는 경쾌한 음악,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까지, 모든 순간이 완벽했다. 해먹의 흔들림을 즐기며 책을 꺼내 읽으려는데, 갑자기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보고 싶다며 전화가 왔다. 다른 친구를 만났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지금 뭐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나 지금 해먹에 누워 있어!”라고 사진을 찍어서 자랑했다. 그리고 짧은 안부를 나누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가히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었다.


한껏 들뜬 기분으로 전화를 끊고 다시 책을 펼쳐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꼬맹이 둘이 누워있는 나한테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저기, 저희 이제 집에 가려고요.”

“... 네?”


나는 순간 이게 나한테 한 말이 맞는가 어안이 벙벙했다. 너희가 집에 가는데 그걸 나한테 왜…?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자, 옆에 캠핑의자에 앉아 있던 아저씨도 일어나셨다.


“그 해먹, 저희 거예요.”

“네?????”


네??? 제가 지금 30분 동안 누워있던 이 해먹이요? 나는 서둘러 해먹에서 내려오려고 애쓰면서, “아니, 원래 여기에 해먹이 늘 있었는데…”라고 말을 더듬었고, 아저씨는 이제 그 해먹들은 치웠고 여기 있는 건 다 개인 소유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남의 해먹에서 보낸 시간들이 머릿속에 촤르륵 펼쳐졌다. 아저씨는 바로 옆에서 그걸 다 지켜보고 계셨던 거다. 너무 부끄럽고 민망하고 죄송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는 사유재산인지 정말 전혀 모르고…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애들이 안 써서 그냥 뒀어요.”


주섬주섬 나무에 걸린 해먹을 걷으면서 짐을 챙기는 아저씨와 꼬맹이들을 향해 나는 연신 잘 썼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사라지자 마침 약속 시간도 다 되었겠다, 나는 도망치듯 해돋이 공원을 빠져나왔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데 황당함에 자꾸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해자인 나도 황당한데, 지켜보고 있던 그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눈앞에서 낯선 여자가 본인들 해먹에 냅다 드러눕다니. 그저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가끔씩 그때 그 일을 떠올리면 창피하기보다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지게 된다. 그것은 아마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내가 해먹에 누워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 그들의 배려 덕분일 것이다. 그 아저씨 말마따나 어차피 안 쓰고 있던 해먹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물건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나는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낯선 이가 쉬고 가도록 지켜만 볼 수 있을까?


작년 10월에는 유독 즐겁고 반짝였던 추억들이 많았다. 그 추억들 가운데 자리 잡은 그날의 너그러움이 떠오를 때마다 나도 관대해야지 다짐하게 된다. 그 아저씨의 배려가 나에게 이런 것을 남겼다. 이렇듯 찰나의 인연도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하면,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더욱 중하게 느껴진다.


이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친구들이 해먹 하나 사라고, 혹은 생일선물로 사주겠다고 했었다. 그때는 들고 다니면서 걸고 걷고 할 게 귀찮아서 거절했었는데, 곧 다가올 봄을 생각하니 하나 사둘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너무 춥지만, 공원에 누워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좋은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다가올 그날을 그리며, 이 추운 겨울도 곧 지나갈 것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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