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성지에서 배운 삶의 동선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후 처음 2년 동안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볼 것도, 놀 것도 많지만 그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나는 ‘잠’과 ‘휴식’을 택했다. 원래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집 밖에 나가면 피로만 쌓인다는 생각이 늘 컸기 때문에 쉽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집에만 있어도 할 일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서울로 올라온 지 정확히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고 지낸 시간이 문득 아깝게 느껴졌다.
“왜 그동안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이렇게 좋은 곳이 많은데. 시간 아깝다.”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간 뒤 나는 서울의 건축 답사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 가보기로 했다.
물론 원래의 게으른 성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 자신과 타협을 했다.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밖으로 나가자."
그렇게 시작된 외출은 자연스럽게 건축물을 찾아가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물론 한여름과 한겨울은 제외였다. 그러니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 나가기 시작하니 다음은 조금 더 쉬워졌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중 흥미로운 공간 하나를 발견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었다. 이곳이 ‘재미있다’고 느낀 이유는 그곳의 역사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축 자체가 흥미로웠다. 지상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이 공원을 산책한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전시 공간과 다양한 공간들이 이어지며 차분하고 깊은 분위기를 만든다. 지상과 지하의 상반된 분위기가 대비되는 건축이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로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 그래서인지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비움’의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기념 공간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화려하게 드러내기보다, 비워 두고 그 안에서 의미를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지상에서 시작된 길은 자연스럽게 지하 공간으로 이어진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다음 공간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넓은 내부 공간에서 길을 잃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멈춰서면서 다음에 갈 길을 정해야 했지만, 생각보다 트인 공간에서 내 발길이 다음으로 향할 곳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건물은 연결이 잘 되어 있구나."
박스형 건물과 선큰 공간, 높게 쌓은 붉은 벽돌 담장, 지상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선형의 흐름. 이 모든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사람들을 다음 공간으로 이끈다. 관람객의 동선과 공연 공간의 동선도 잘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새로운 공간을 돌아본 후 스케치를 하는 습관이 있다. 한 곳을 다녀오면 최대한 기억에 의존해 평면을 그려본다. 집에 돌아와 스케치를 하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동선이 잘 정리되어 있었구나."
공간은 나를 자연스럽게 다음 장소로 인도했고, 덕분에 나는 헤매지 않고 모든 공간을 둘러보고 나올 수 있었다. 건축가는 이미 그 길을 설계해 두었던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선은 결국 내가 걷는 길이다.
건축에서 동선은 사람이 이동하는 길을 의미한다.
하지만 삶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복잡하고 목적이 없는 길에서는 쉽게 방향을 잃는다.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추기도 하고, 길을 찾지 못해 맴돌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방향을 찾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지금 나의 삶도 그런 길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나는 여전히 내 길을 걷고 있다는 것.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서울 중구에 위치하며,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로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공간이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건축물이 공원 아래 지하 공간으로 이어지며,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