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JUL 2019
나는 한국으로, 친구는 파리로 향하는 날이다. 열흘 치 짐을 들고 생테밀리옹에서 보르도로, 보르도에서 파리 혹은 샤를 드 골로 이동하는 경로가 만만치 않아, 우리를 가이드해 주었던 무슈 라피트가 일정 요금을 받고 보르도 생 장 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지난밤 만찬을 아직 전부 소화시키지 못한 우리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꺄늘레 하나로 아침을 대신했고 무슈 라피트가 추천해 준 제과점에서 추가로 꺄늘레 몇 개씩을 구매했다.
과거 보르도 지역에서는 와인의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달걀흰자를 사용했으며, 여전히 그 방식을 고수하는 와인 메이커들도 있다. 이때 남은 노른자를 활용하기 위해 수녀님들이 개발한 구움 과자가 바로 꺄늘레다. 리스본에 갔을 때는 수녀복에 흰자로 풀을 먹이고 남은 노른자로 수녀님들이 만든 것이 포르투갈의 유명한 에그 타르트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수녀님이 남는 달걀노른자를 만나면 무조건 맛난 파티스리가 탄생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틀 만에 만난 무슈 라피트는 여전히 친절했고, 안전하게 우리를 생 장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친구의 기차 시간이 나보다 일러 플랫폼에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타지에서 열흘을 함께 보내고 따로 집에 가려니 어쩐지 마음이 헛헛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는데, 한국에서도 허구한 날 보는 사이라는 사실이 곧 떠올라 이번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기차 출발까지 두세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나는 역에 짐을 보관해 두고 시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되면 한 번 들러보자 했지만 일정에 치여 포기했던 마르쉐 데 카퓌생 Marché des Capucins, 그중에서도 신선한 해산물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오이스터 바 셰 장-미 Chez Jean-Mi가 나의 목적지다. 도보로 20 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걷기를 택했는데 길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여성 혼자라면, 혹은 어둑한 시간 이 경로를 택할 거라면 버스 타기를 추천한다.
카퓌생 시장은 특별할 것 없는,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케이드 형 시장이다. 각종 채소부터 과일, 해산물과 고기, 치즈, 소시지, 그리고 간단한 요기가 가능한 조리된 음식을 만날 수 있다. 몇 바퀴 뱅뱅 돌다 찾아낸 셰 장-미에는 보르들레(보르도 사람), 타 지역에서 온 프랑스인, 나 같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이미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기차 시간이 살짝 걱정됐지만 회전율이 빠른 것 같아 기다리기로 했고, 15분쯤 흐른 후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간단히 굴만 맛볼까 하다가 저녁 비행기에 타서 기내식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좀 배가 고플 것 같아서(사실은 그냥 맛있을 것 같아서) 굴과 소라, 새우가 배 모양의 그릇에 고루 담긴 '삐나스 Pinasse(범선)'와 엉트르 되 메르 한 잔을 주문했다. 혼자서 팔을 걷어붙이고 도구를 사용해 열심히 발라 먹으려니 처음에는 좀 민망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잊고 말았다.
프랑스에서는 해산물이 좀 호화스러운 음식이다. 적어도 학생 시절의 나에겐 그랬다. 파리 시내 곳곳에는 영국식 애프터눈 티용 3단 플레이트의 확대 버전 같은 식기에 얼음이 잔뜩 올라가 있고, 그 위에 굴과 게, 각종 어패류를 얹어 서빙하는 고급 해산물 식당이 있다. 유학생 사정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든 가격이었는데, 그래도 꼭 한 번은 먹어보고 싶어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 남은 돈을 눈여겨봐 두었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쓰고 왔다. 막상 한꺼번에 적지 않은 양의 갑각류, 어패류를 먹었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저녁에 고생했던 기억이다.
물론 그런 레스토랑에 비하면 호화로운 기분은 없지만, 15유로 남짓에 다양한 해산물을 맛보고 와인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꽤 훌륭한 딜이다. 구글맵의 수많은 리뷰와 길게 늘어선 줄도 이해가 간다. 바쁜 와중에도 서버들은 친절했고, 옆 테이블에서는 두 커플이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기분 좋게 보르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걸어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내가 떠난 후 유럽에는 다시 한번 폭염이 몰아쳤다고 한다. 친구는 파리에서 샹파뉴로 가는 길,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기차 안에서 벌겋게 익어버렸다고.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두 영국 배우의 샹파뉴 방문기를 보며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