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케나보 아르 웨 샬, 다시 만나고픈 식사

by 페쉬플랏

20.JUL 2019

하루를 온전히 다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밝았다. 호텔 레스토랑에 들러보았지만 조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밖의 카페를 찾아 나섰다. 종탑 아래 있는 가게만 유일하게 문을 열어 자리를 잡고 바게트와 크루아상, 오렌지 주스와 커피가 제공되는 아침메뉴를 주문했다. 관광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하나뿐인 카페다 보니 그리 만족스러운 맛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에서 그리운 것을 고르라면 세 손가락 안에 꼽던 것이 프랑스식 아침식사인지라 기쁜 마음으로 먹었다. 먼저 나온 커피가 식어갈 때쯤 성당의 종탑에선 종이 울렸고,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동네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미리 예약해둔 저녁식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정도 없는, 그야말로 놀고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IMG_4141_Original.jpg


여행 안내소에서 지도도 받고, 무슈 라피트가 소개해준 와인 숍에 들러 눈호강을 한 뒤 동네 외곽에 있는 역시 하나뿐인 마트에서 물과 요거트, 과일을 조금 산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이용객은 우리뿐이었고, 잔잔한 새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친구가 풀을 멋지게 가로지르는 모습을 촬영해주거나 난간을 잡고 물속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다가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기도 했다.


20jul2019.jpg


점심은 호텔 바로 건너편에 있는, 트립 어드바이저 평이 좋은 베트남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본격적인 수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물속에서 조금 떨기도 했고 오랜만에 따듯한 국물이 그리웠던 참인데, 아쉽게도 쌀국수를 하지 않는 날이었다. 대신 채소가 듬뿍 얹힌 볶음 국수와 오리 요리를 쌀밥에 얹어 즐겁게 먹었다. 친구는 셰프에게 요리에 쓰인 소스에 대해 물었고, 베트나미즈 서버는 한국말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볕이 뜨거워져 수영장 뒤편에 마련된 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긴 것만 빼면, 오후 시간도 거의 똑같이 흘러갔다. 방으로 올라와서 몸을 씻고 나서는 이번 휴가를 통틀어 가장 공들인 단장을 시작했다. 보르도에서 산 원피스를 입고, 가져온 것 중 가장 화려한 귀걸이를 꺼내 걸었다. 마지막 밤을 기념해 미슐랭 투스타를 받은 따블르 드 쁠레정스Table de Plaisance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잘 차려입고 파인 다이닝을 경험하는 건 무리를 해서라도 즐기고 싶은 활동 중 하나다. 믿을만한 리뷰어의 극찬이 있었기에 기대도 컸다.


IMG_3710.JPG
20jul2019tarte_fraise.jpg
IMG_3716.JPG
IMG_3700.JPG


레스토랑에 도착하고, 먼저 테라스로 안내를 받아 식전주를 마셨다. 담 밖으로 너른 포도밭이 보이는 이 테라스에는 잘 차려입은 손님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식전주를 비우고 생떼밀리옹의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몇 장 찍고 나니 서버가 다가와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서비스는 친절하고 따듯하다기보다는 엄숙하고 절도 있었다. 식사 끝무렵에 나타난 커다란 거대한 치즈 트레이, 그리고 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란 민트 화분을 끌고 오더니 눈 앞에서 잘라 차를 만들어주던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8개의 코스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다. 절대 먹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비둘기 요리도, 입 안에 남은 묵직함을 깔끔히 정리해 주던 레몬 바질 소르베도 마음에 들었다.


허리에 꼭 맞는 새 원피스가 조금 원망스러워질 때쯤 4시간여에 걸친 식사가 끝났다. 돌아갈 때 한 손에 들려준 파운드케이크와 셰프의 메시지까지, 세심하게 준비된 공연을 한 편 본 기분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신념을 요리에 그대로 반영하는 브르타뉴 출신의 셰프 로낭 케르바렉은 카드 맨 아래에 '케나보 아르 웨샬 Kenavo ar wech all'라고 적었다. 브르타뉴어로 '또 만나요'라는 뜻이다.


IMG_4284_Original.JPG
IMG_5750.jpg 출처- 신의 물방울 21권

부푼 배와 마음을 안고, 우리는 아침식사를 했던 종탑 옆으로 갔다. 생떼밀리옹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스팟이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만화 <신의 물방울>을 뒤적이다가, 시즈쿠와 미야비가 해진 뒤 그 자리에 서서 우리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컷을 발견하곤 꽤 반가웠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슈 라피트와 강 오른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