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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라피트와 강 오른편

by 페쉬플랏

19. JUL 2019 9h00-14h00

그의 이름은 장 피에르. 성은 라피트. 우리의 두 번째 투어, 즉 보르도 오른쪽을 둘러보는 데 도움을 줄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다. 와인 투어 가이드의 성이 라피트라니, 친구와 나는 혹시 샤토 라피트와 관계있는 인물이 아닐까 잠시 기대했다. 집 앞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우리를 자신의 벤에 태운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보르도의 이름 높은 5대 샤토 중 하나와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혔다. (샤토 라피트-로쉴드 Château Lafite-Rothchildes는 프랑스 금융그룹 로쉴드가 소유하고 있고, '라피트'는 소유주의 성과는 관련이 없으며, 가스콩어로 작은 언덕을 뜻하는 'La hite'에서 유래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상관없다. 그는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극강의 평점을 자랑하는 가이드로, 예약금도 받지 않고 투어를 마친 뒤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프라이빗 투어이니 꽤 비싸긴 했지만, 적어도 어제보다는 밀도 있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하며 우리는 도시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 흐린 날씨 속에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포므롤의 샤토 보르가르 Château Beauregard. 12세기부터 경작되어 17세기에 보르가르 가문이 처음으로 정식 건물을 세운 이 샤토는 2014년 갤러리 라파예트를 소유한 물랑 가문, 그리고 코스메틱 브랜드 꼬달리를 소유한 카티아르 가문에 팔렸다. 자갈과 점토, 모래로 이루어진 17.5 헥타르의 토양에서 평균 수령 35년 세의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이 자라고, 최첨단 레이저 기기로 분류된 포도들은 거대한 콘크리트 통 안에서 알코올 발효를 거친다.


20세기 초반 주류를 이루었던 콘크리트 발효는 80년대 스테인리스 스틸 통의 등장으로 2천 년대 초반까지 구닥다리 취급을 받다 최근 다시 제자리를 찾는 중이다. 오크통 발효와 유사한 미세한 산소 투과로 부드러운 타닌을 만들며,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와인의 향에 영향을 주지 않아 토양과 품종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오크통 발효와의 차이점이다. 발효를 마친 보르가르의 와인은 오크통에서 15~20 달간 숙성된다.



19. JUL 2019 14h00-18h00

검은 과실과 삼나무, 흙의 아로마가 느껴진 2016년 산 샤토 보르가르와 세컨드 라인인 벙자망 드 보르가르 2015년 산을 시음한 뒤, 장 피에르는 우리를 생테밀리옹 시내의 한 식당 앞에 내려주었다. 렁베르 뒤 데꼬르 L'Envers du Décor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지역 유명 레스토랑인 오스텔르리 드 쁠레정스Hostellerie de Plaisance에서 운영하는 캐주얼한 식당이다. 테라스에 앉은 우리는 먼저 커피와 작은 꺄늘레로 무거운 머리를 깨우고, 라따뚜이와 흰 살 생선 요리, 그리고 스테이크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한층 맑아진 날씨 속에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샤토 데귀 Château d'Aiguilhe. 눈부신 금발과 넉넉한 풍채, 쾌활한 성격의 여성 관리인이 우리를 맞이해 보르가르에 비해 광활한 부지로 안내했다. 13세기부터 와인 생산에 관여해온 독일 귀족 네이뻬르 가문이 프랑스에 소유한 여러 샤토들 중 하나인 샤토 데귀는 최근 떠오르고 있다는 까스띠용 지역에 위치한다.



진흙과 라임스톤 대지에서 평균 수령 28년의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을 키워내며, 나무와 콘크리트 통에서 25-30일 동안 알코올 발효를 거친다. 15-18개월의 오크 숙성에는 새 오크통이 50% 이상 사용된다. 독특하게도 2015년부터는 소비뇽 블랑 100%의 르 블랑 데귀 Le Blanc d'Aiguilhe도 만들고 있다. 관리인의 설명에 따르면 밭 한 켠에는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포도들을 가져와 까스티용의 토양에서 소량씩 키워보는 표본 재배 구역이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방식에 머물지 않고 실험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샤토였다. 시음한 2015년 샤토 데귀가 마음에 들 2010년을 한 병 구입했으나 아쉽게도 9년을 버틸 와인은 아니었던지, 오히려 샤토에서 맛본 2015년 바틀이 나았다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는 생테밀리옹의 샤토 르 샤틀레 Château le Chatelet를 방문해 와인 저장고를 간단히 둘러봤다. 르 샤틀레는 3.18헥타르의 밭에서 연간 15,000병 이하의 와인만을 생산하는 소규모 샤토다. 샤토를 운영하는 알랭은 장 피에르와 친분이 깊어 보였고, 우리에게 프리미엄 라인까지 아낌없이 시음을 허락했다. 마지막에 맛본 소테른(또!)은 혀에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 맛이 없으면서도 꿀처럼 진하고 향기로웠다. 다만 한 가지, 장 피에르와 알랭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량 구매를 권했는데, 거기서 신뢰를 약간 잃고 말았다. 선뜻 구매하기에 쉬운 가격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생각해보고 한국에서 주문하겠다고 답했고, 알랭은 괜찮다며, 다만 워낙 소량 생산이라 좋은 바틀이 남아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박스 구매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만, 이왕 간 김에 한 병 정도는 사 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지금에 와서는 조금 남는다.


긴 하루를 모두 마치고, 우리는 장 피에르에게 대금을 치른 뒤 생테밀리옹 시내 중심(이라고 할 것도 없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에 위치한 호텔로 들어섰다. 작지만 효율적으로 꾸며진 방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수영장을 갖춘 오 로지 데 렁빠르Au Logis des Remparts가 이틀 동안 우리의 숙소. 점심 식사와 야금야금 시음한 와인이 아직 내려가지 않은 상태라 저녁은 생략하기로 하고, 잠시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낸 뒤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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