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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거울에서 보낸 한때

by 페쉬플랏

18.JUL 2019 9h00-14h00

오후 두 시에 예정된 메독 지역 투어를 앞두고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에 쇼핑을 하기로 했다. 친구는 눈여겨봐 뒀던 공원으로 조깅을 다녀왔고, 나는 천천히 아침을 먹으며 준비했다. 때마침 프랑스는 여름 세일의 끝무렵, 남은 물건은 적지만 가격은 크게 다운된 상태였다.


꼼뚜와 데 꼬또니에, 클로디 피에로, 쿠플스 등 한국에 없거나 꽤 비싸게 판매되는 브랜드 매장에 차례로 들른 뒤 마지막으로 1880년 문을 연 와인 숍 바디BADIE에 방문했다. 보르도 시내 중심인 투르니 가에 꽤 큰 규모로 자리한 바디는 두 군데로 나눠져 있는데, 왼쪽 가게에서는 샴페인을, 오른쪽 가게에서는 스틸 와인을 취급한다. 보르도 와인은 이틀에 걸친 투어에서 테이스팅 후 구입할 가능성이 크니 차라리 부르고뉴 와인을 구입하기로 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고른 것은 르 플레브의 퓔리니 몽라셰 2014. 혼자서 사 본 와인 중 가장 고가로, 언제 열어야 할지 몰라서 5개월째 셀러에 고요히 누워있다.


18.JUL 2019 14h00-18h00


관광 안내소 앞에서 투어 팀을 만나 벤에 올랐다. 친구와 나를 빼고는 모두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었다. 마고 마을로 향하는 내내 가이드는 보르도 와인의 역사에 대해 소개했는데, 지역 외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하던 보르도 와인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계기가 흥미로웠다.


1137년 왕위에 오른 루이 7세와 그의 왕비 알리에노르 다키텐은 15년의 결혼 생활 동안 딸 둘밖에 낳지 못했고, (아주 먼) 혈연관계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교황청으로부터 결혼 취소 승인을 받아낸다. 알리에노르는 노르망디 공작과 재혼하는데 훗날 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프랑스의 서쪽도 잉글랜드의 영토가 된다. 이때부터 보르도 와인은 관세 없이 영국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덩달아 그 명성도 높아져 갔다는 것이다.


와인 한 병의 용량이 1L도, 500 ML도 아닌 750ML인 것 역시 영국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명확한 사실은 아니고, 750ML 병의 탄생에 대한 다양한 설명 중 하나다). 보르도 와인의 주 소비국이 영국이다 보니 영국 단위인 영국 갤런(4.546L)에 맞춰 수출했던 것. 1 영국 갤런을 6으로 나누면 약 750M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도 와인 1박스에는 6 병이 들어간다.


가는 동안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며 즐거웠지만, 투어는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마고 마을의 샤토 프리외레 리쉰 Château Prieuré-Lichine, 샤토 라스꽁브Château Lascombe 였는데, 포도밭을 찬찬히 둘러보거나 맘 편히 시음할 시간 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토 투어 담당자들의 기계적인 설명을 듣고 나면 재빨리 차에 올라타 다음 장소로 향해야 했고, 꾸물대다가는 동행한 할아버지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지친 심정으로 보르도 시내로 돌아오는 동안에는 가이드가 끊임없이 퍼부어주는 정보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18.JUL 2019 18h00-22h00

투어 일행과 헤어진 후에는 아쉬움을 달래려 친구와 함께 테이스팅이 가능한 Max Bordeaux 와인 갤러리에 들렀다. 카드를 발급받아 기계에 넣고 와인 종류와 용량을 고르면 자동으로 서브되는 시스템이었다. 한국에서 마셔보기 힘든 샤토의 2010~2012년 산 와인을 주로 맛봤다. 확실히 보르도 와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다.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건 샤토 디켐Château d'Yquem의 소테른. 꽃 향과 망고스틴, 파인애플 등 다소 무거운 열대 과일의 향, 당분이 버터처럼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느낌이 환상적이었다. 한 잔을 가지고 나누어 테이스팅 했는데, 조금만 더 맛보고 싶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마셨다는 이야기. 이쯤 되면 내가 스위트 와인을 싫어한다는 생각에도 조금 변화가 생긴다.


저녁으로 Café Japonais에서 연어 덮밥과 꼬치구이 벤또, 미소국을 만족스럽게 먹고 성벽을 따라 차려진 테라스 주변을 걷다 플라스 드 라 부르스Place de la Bourse에 도착했다. 보르도를 방문하는 모든 여행객들이 한 번쯤 들러 사진을 남기는 물의 거울, 미루아 도Miroir d'eau가 있는 곳이다. 광장 표면에 얕게 물을 뿌려 부르스 궁전(현재는 상공회의소로 사용되고 있다)의 파사드가 거울처럼 반사되는 풍경은 관광지의 랜드마크에 심드렁한 사람이라도 감탄할만하다.


운 좋게 노을질 무렵 도착해 야경까지 감상하며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대부분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아무리 여유롭게 일정을 짜도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완벽한 순간이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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