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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쉬플랏 Jan 12. 2021

첫인상이 다는 아니지만요

와인 레이블의 세계

‘뚝배기보다 장 맛이다’,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 대상의 본질이 아닌 외양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격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존재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제아무리 멋진 뚝배기에 담겼다 한들 장 맛이 엉망이면 애써 준비한 요리를 망칠 테고, 세련된 색감과 멋진 폰트로 장식한 표지가 책의 퀄리티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


사진 출처: Unsplash @ray027


와인도 마찬가지다. 병의 무게감이나 독특한 디자인, 어딘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이블만 믿고 와인을 샀다가 후회한 경험은 와인을 마시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사전 정보가 없는 소비자에게 와인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이 와인의 본질은 아니지만, 와인의 본질을 표현하는 창구는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은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는 특별한 와인 레이블 디자인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왼쪽부터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가 작업한 샤토 무통 로쉴드의 레이블 / 사진 출처: www.chateau-mouton-rothschild.com


1. 전 세계 유명 화가는 모두 여기에, 샤토 무통 로쉴드


데이비드 호크니, 제프 쿤스, 키스 해링, 앤디 워홀,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고유의 화풍과 아이디어로 미술계를 넘어 대중의 주목까지 한몸에 받은 아티스트? 그것도 맞다. 그러나 이 쟁쟁한 이름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샤토 무통 로쉴드(Château Mouton Rothschild)의 레이블에 작품을 올린 화가라는 점이다.


1945년 승전 기념 레이블을 그린 필립 줄리앙 / 사진 출처: genève enchère , www.chateau-mouton-rothschild.com


샤토 무통 로쉴드를 그랑 크뤼 2등급에서 1등급으로 편입시킨 주역 바롱 필립. 그는 1924년 장 카를뤼의 포스터를 레이블에 처음 도입한 이후 1945년부터 샤토 무통 로쉴드의 레이블에 당대 아티스트의 작품을 넣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 첫 주자 필립 줄리앙은 연합국의 2차 세계대전 승리를 상징하는 V와 ‘ANNÉE DE LA VICTOIRE (승리의 해)’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 레이블을 그려 1945년 무통을 장식했다.


(좌)찰스 왕세자가 그린 2004년 레이블, (우)한국의 이우환 화백이 그린 2013년 레이블 / 사진 출처: www.chateau-mouton-rothschild.com


당시의 필립 줄리앙은 무명이었다지만, 무통의 레이블을 캔버스 삼아 작품을 발표한 화가들 리스트에는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들어 봤음직한 이름들이 즐비하다. 위에서 언급한 화가들 외에도 마르크 샤갈, 프란시스 베이컨, 호안 미로, 조르주 브라크, 장 콕토 등의 예술가들이 레이블 작업에 참여했다. 심지어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도 영불 협상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소나무 그림으로 2004년 무통의 레이블을 장식했다. 한국 화가도 있다. 점과 선, 여백을 활용해 철학적인 작품을 발표해온 이우환은 2013년 샤토 무통 로쉴드의 레이블 작업에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우측으로 갈수록 점차 깊고 확고해지는 자줏빛 형상이 인상적이다.


쪽부터 살바도르 달리, 레이몽 사비냑, 쑤 레이가 그린 레이블 / 사진 출처: www.chateau-mouton-rothschild.com


‘무통(mouton: 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양이 주요 모티브로 사용된 작품도 많다. 아티스트의 개성에 따라 때로는 만화처럼, 때로는 추상적으로, 또 가끔은 신화적인 느낌으로 등장하는 양의 다양한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샤토 무통 로쉴드의 레이블을 구경하는 쏠쏠한 재미다.


몰리두커 설립자인 사라와 스파키 마르키 부부 / 사진 출처: Owen Bargreen


2. 왼손잡이의 자존심, 몰리두커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호주 와이너리 중 하나인 몰리두커(Mollydooker)는 어딘가 뽀빠이와 올리브를 떠올리게 하는, 위트 있고 사랑스러운 레이블로도 유명하다. ‘몰리두커’는 호주 방언으로 ‘왼손잡이’를 뜻한다. 와이너리를 설립한 스파키와 사라 부부를 포함해 가족 구성원 및 직원의 절반 이상이 왼손잡이라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는데, 레이블 디자인에서도 이 왼손잡이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좌) 몰리두커의 더 복서와 투 레프트 피트, (우) 몰리두커의 바이올리니스트 / 사진 출처: mollydookerwines.com


100% 쉬라즈로 만든 ‘더 복서(The Boxer)’의 일러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락부락한 복서가 오른손에도 왼쪽 글로브를 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왼손잡이 와이너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쉬라즈(시라) 품종의 큰형님 격인 프랑스 북부 론에 도전장을 던지는, 몰리두커의 자신만만함을 드러낸 그림이라고 한다. 쉬라즈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를 블렌딩한 투 레프트 피트(Two Left Feet)에는 함께 춤추는 남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춤에 서툰 남성이 여성의 발을 밟고 당황하는 장면이 담겨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몸치나 행동이 어설픈 사람을 빗대는 ‘왼발만 두 개다(Have two left feet)’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일러스트다.


몰리두커의 유일한 화이트 와인, ‘바이올리니스트(Violinist)’의 레이블에는 설립자 중 한 명인 사라의 어린 시절 일화가 반영되어 있다. 왼손잡이인 사라가 바이올린 선생님에게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켜면 안 되느냐’고 묻자 선생님은 여럿이 연주할 때 옆 연주자를 활로 찌르게 될 수 있으니 처음부터 오른손으로 배워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바이올리니스트의 레이블에는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 옆에 있는 친구의 얼굴을 찌르는 소녀의 모습이 깜찍하게 표현되어 있다.


장 피에르 로비노의 ‘레 자네 폴’ 레이블 / 사진 출처: Tutto Wine


3. 레이블에 담긴 내추럴 와인의 개성


내추럴 와인 붐이 일면서 와인은 더욱 다양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지역의 전통적인 포도 품종이나 양조 방식에서 벗어나 개성과 혁신을 추구하는 내추럴 와인의 특성상 깐깐한 규칙을 강제하는 지역 등급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품종도, 빈티지도 표기하지 못하는 대신 와인의 이미지와 개성을 레이블 디자인으로 드러내며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 이런 레이블은 정확한 정보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약점이 있겠으나, 보다 직관적으로 와인을 고르며 경험치를 늘려가는 재미를 더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파리에 내추럴 와인바를 열며 뱅 드 나튀르(Vin de nature: 내추럴 와인)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장 피에르 로비노(Jean Pierre Robinot)의 와인들은 로비노 자신 혹은 딸이 직접 그린 그림, 빛이 번진 듯한 효과를 넣은 사진들로 매년 새 옷을 입는다. 특히 피노 도니스(Pineau d’Aunis)와 슈냉 블랑(Chenin Blanc)으로 만든 로페라 데 뱅 (l’Opéra des Vins) ‘레 자네 폴(Les Années Folles : The Crazy years)’은 레이블 디자인만으도 펫낫(Pét-Nat) 특유의 자글자글한 탄산과 이름이 담고 있는 자유분방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개성 있고 반항적인 얼굴 일러스트가 들어간 델링퀀트의 레이블 / 사진 출처 : delinquentewineco.com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리버랜드에서 이탈리아 남부 품종으로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델링퀀트(Delinquente : 위반자, 비행자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는 타투로 뒤덮인 강렬한 얼굴 일러스트를 레이블에 활용한다. 아티스트 제이슨 코엔의 작품인 이 일러스트들은 정해진 룰을 깨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델링퀀트의 양조 철학을 잘 담고 있으며 인종과 성별, 성 정체성, 종교적 신념을 불문하고 ‘터프한’ 사람들의 얼굴을 과감하게 그려낸다. 와인숍 선반의 다른 와인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이 목표라니, 말 그대로 틀과 격을 깨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의 호기로움이 느껴지는 레이블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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