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연말 모임을 위한 술 추천
유난히 힘들었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원한 생맥주 한 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간 뮤직 페스티벌에서 마시는 레드불 칵테일, 조용하고 어두운 바에서 연인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음미하는 싱글몰트위스키… 이 모든 것의 소중함을 여실히 깨달은 한 해였다. 코로나로 뒤덮인 1년을 어찌어찌 무사히 보냈으니 내심 연말 파티만큼은 왁자지껄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을 비웃는 것처럼 확진자 수가 천 명을 넘어서 버렸다. 불안한 심정을 마스크로 싸매고 나간다 한들, 9시면 가게 영업이 끝나므로 한창 흥이 오를 때 신데렐라처럼 서둘러 귀가해야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말 약속은 모두 취소했다. 예약을 걸어 두었던 식당이나 바에도 미리 연락을 드렸다. 이 겨울이 마지막 고비이리라 믿으며, 백신이 상용화되면 내년 연말에는 달라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 대신 랜선 파티를 기획했다. 아무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멀리 사는 친구도, 아이를 맡기고 외출하기 어려워 모임에 번번이 불참해야 했던 친구도 함께할 수 있으니 나름의 장점도 있다. 모두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는 대면 모임에 비해 내가 좋아하는 술과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크다. 뭘 마시면 이 허무한 연말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후보 몇 개를 들고 왔으니 지금부터 함께 골라 보자. 랜선 파티가 열리는 책상 위에 올려둘 한 병의 술.
‘연말’이라는 단어에도, ‘파티’라는 단어에도 찰떡같이 어울리는 술은 단연 샴페인이다. 하지만 혼자 먹자고 덜컥 한 병을 지르기에는 가격이 부담될 뿐 아니라 기포가 있어 한꺼번에 많이 마시면 배도 부르고, 대충 막아 놨다 며칠에 걸쳐 즐기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플루트 잔에 담겨 보글거리는 우아한 거품을 포기할 수 없다면? 피콜로 사이즈 혹은 하프 사이즈 보틀로 눈을 돌려보자. 가격도, 다 마셔야 한다는 부담감도 쑥 내려가지만 연말의 버블리한 분위기는 충분히 연출할 수 있을 테니까.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피노 뫼니에가 만나 신선한 흰 꽃의 아로마와 잘 익은 과실 향이 밸런스를 이루는 도츠 브뤼 클래식(Deutz Brut Classic), 구운 빵의 고소한 아로마를 적당한 산미가 받쳐주는 데다 베르사유 궁전 화가를 선조로 두었다는 샴페인 하우스답게 화려한 레이블로 연말 분위기를 더해주는 앙드레 끌루에 그랑 리저브 브뤼(André Clouet Grande Réserve Brut)의 하프 보틀을 추천한다.
꼭 샴페인이 아니어도 좋다. 즐겁게 대화하며 부담 없이 청량감을 만끽하기에는 오히려 까바나 프로세코가 제격이다. 선물 상자를 연상케 하는 세련된 하늘색 레이블이 인상적인 라마르카 프로세코(La Marca Prosecco), 블랙 컬러의 중량감 있는 병 디자인과 달리 풍부한 과일 향과 톡톡 튀는 탄산감이 특징인 프레시넷 꼬든 네그로(Freixenet Cordon Negro)는 피콜로 사이즈로도 출시되니 가볍게 한잔만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눈여겨보자.
모니터 너머로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쭉 함께할 술이 필요한 이, 그러면서 주량에도 자신이 있는 이에게는 묵직하고 파워풀한 레드를 권한다. 북부 론의 에르미타주나 꼬뜨 로띠, 피에몬테의 바롤로처럼 평소라면 오랫동안 병 브리딩을 하거나 디캔팅했을 와인을 모임 시작 바로 전에 열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병을 비우는 것이다. 물론 첫 잔은 아쉬울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집에 돌아갈 걱정도 없고, 파티가 끝나면 홀로 그 여운을 만끽하며 와인의 근사한 진면목을 즐길 수도 있으니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닐까? UC 데이비스의 와인 화학자 앤드루 워터하우스(Andrew Waterhouse)에 따르면, 와인의 아로마는 오픈 후 첫 10분에서 30분 동안 가장 큰 변화를 보여준다고 하니 너무 어리지 않은 보틀을 골라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마신다면 파티 중에도 충분히 인상적인 변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날 땀을 한 바가지 쏟은 후에 벌컥벌컥 마시는 게 ‘맥주의 참맛’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진정한 맥주 긱(geek)이라면 기온이 떨어졌다고 쉽게 한눈 팔 수는 없는 법. 명색이 파티인데 배만 부르고 하나도 안 취하면 무슨 재미냐고? 이 시국에 찬 맥주 마시고 기침하면 책임질 거냐고? ‘윈터 워머(Winter Warmer)’라 불리는 높은 도수의 겨울 맥주들을 고른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풍미 또한 부드럽고 리치한 것이 많으니 오히려 뱃속이 뜨듯해질 가능성이 높다.
종류도 개성도 다양한 윈터 워머들 중 랜선 연말 파티에 잘 어울리는 녀석은 누굴까. 독한 라거를 뜻하는 독일어 ‘복(bock)’에 더블이라는 의미의 ‘도펠(doppel)’까지 붙은 도펠복(doppelbock)이 가장 강력한 후보다. 알코올 도수는 7~8도 정도가 대부분이지만 독한 것은 12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크리미한 거품, 검붉은 주색, 커피와 그을린 캐러멜 아로마로 사랑받는 아잉거 셀러브레이터 도펠복(Ayinger Celebrator Doppelbock)은 시간이 흐르며 달콤함과 풍미가 더해진다니, 이 술을 전용 잔에 따라 천천히 음미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
포터 맥주를 하일랜드 파크 위스키 배럴에 숙성한 하비스턴(Harviestoun)의 올라덥(Ola Dubh)이나 태운 맥아에서 나오는 짙은 초콜릿 아로마로 19세기 러시아 황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임페리얼 스타우트의 현대판 대표 주자 올드 라스푸틴(Old Rasputin) 역시 추운 겨울밤, 조금은 쓸쓸할 수밖에 없는 랜선 파티에 꽤 잘 어울릴 듯하다.
랜선 파티 일정이 크리스마스 가까이로 정해졌다면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칵테일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금 번거로울 수는 있지만, 어찌 됐든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절약되었으니까. 에그노그(Eggnog)는 설탕을 넣고 푼 계란 노른자에 우유와 브랜디, 다크 럼을 넣고 휘핑한 생크림과 흰자, 넛맥 가루를 올리는 미국 남부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칵테일이다. 칵테일에 계란을 넣는다는 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으나 쌍화차나 커피에 계란을 띄워 마시던 우리 민족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넛맥 가루는 계란과 우유 비린내를 잡아줄 뿐 아니라 따듯한 풍미까지 더해주니 꼭 넣는 게 좋지만 과잉 섭취 시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어 소량만 사용해야 한다. 찬 우유와 얼음을 사용해 시원하게 마셔도 좋고 데운 우유를 넣고 머그컵에 담아 호호 불어가며 마셔도 좋다. 취향에 맞는 에그노그를 만들어 제대로 된 연말 분위기를 만끽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