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살던 2년 남짓, 일주일에 못 해도 세 개의 빈 병을 배출하며 성실히 와인을 마셨다. 내가 뭘 마시는지 잘 모를 때였다. 묵직하고 떫은 레드를 좋아하는 취향만 있었고 대체로 보르도나 론 와인이 내 입에 맞는다는 정도의 지식이 전부였다. 와인숍은 선물용 와인을 살 때나 들렀을 뿐 직접 마실 와인의 주요 공급처는 대형 마트였다. 그러다 귀국해서 와인 수업을 들으며 보다 다양한 스타일에 눈뜨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와인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를 만날 때마다 바닥을 구르며 후회했다. 이거 프랑스에서 30유로면 산다던데. 아, 프랑스 가고 싶다.
와인을 사고 싶을 때마다 프랑스에 갈 수는 없다. 지금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는 더욱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직구 사이트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세율이 워낙 높아서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문할 만큼 메리트가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해보지 않고 걱정만 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도전해 보기로 했다. 총알 배송에 길든 한국인은 뭐든 느리기로 악명 높은 프랑스에서 무사히 와인을 배송받았을까? 지금부터 나의 밀레짐 와인 직구 수난기(?)를 시작한다.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와인 직구 사이트 밀레짐(millesimes.com)에 가입했다. 상단의 내비게이션에서 보르도, 부르고뉴 등 큰 단위의 지역을 선택한 후 와이너리를 고르는 시스템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와이너리가 없어서 ‘모든 도멘 보기(all domaines available)’를 선택한 뒤 지역별로 살펴봤다. 몇 가지 사보고 싶은 게 걸리기는 하는데, 이 빈티지 괜찮은 건가? 가격은 이 정도면 한국보다 싼 건가? 잘 모르겠다. 어느덧 열두 시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일단 자고 주말에 다시 봐야지.
TIP. 사이트의 기본 언어 설정은 프랑스어지만 영어로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우측 상단의 영국 깃발을 누르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화면 중앙에 종종 올라오는 할인 코드 안내 배너다. 5월 마지막 주 현재 어머니의 날을 기념해 몇 가지 스틸 와인과 샴페인에 적용되는 할인 코드를 제공 중인데,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설정되어 있을 때만 이 안내가 보인다. 올 3월 봄맞이 할인 코드 행사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고 하니 프랑스어로 설정된 상태에서 ‘le code’ 등의 단어가 있는지 중앙의 배너를 끝까지 넘겨보자. 할인 가격으로 구매하면 물품 전체의 가격이 낮아져 세금 또한 줄어든다는 사실.
어버이날 식사를 마치고 노트북을 열어 다시 밀레짐에 접속했다. 너무 잘 고르려고 애쓰면 주문을 영영 못 할 것 같아 일단 눈에 띄는 이름을 비비노에 검색했다. 다행히 평점 4.0 이상인 게 많았다. 내가 사려는 빈티지가 괜찮은지, 언제가 시음 적기이고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해 빈티지 차트도 확인했다. 괜히 한국에서 편히 살 수 있는 걸 배송비에 세금 물어가며 직구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블로그와 비노봇을 돌며 한국 판매 가격을 살펴봤다.
어떤 건 배송비와 세금까지 고려하면 한국이 더 쌌고, 어떤 건 직구가 5만 원 정도 이득이었다. 한국에 수입은 되는 것 같은데 가격 정보가 없는 와인도 있었고(하필이면 그게 제일 비싼 녀석이라 고민 많이 했다.) 아예 수입되지 않는 와인도 있었다. 시간과 발품 들여 숍을 돌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고려해서 한국 가격과 비슷하거나 1만 원 정도 비싼 샴페인도 그냥 사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어차피 주말이라 오늘 사나 내일 사나 큰 차이가 없을 테니 다음날 장바구니를 한 번 더 검토하고 결제하기로 한다.
TIP_1. 한국에서 주문하면 프랑스 소비세는 면제되고, 대신 와인이 한국에 도착하면 주세, 교육세, 부가세를 내야 한다(FTA 협정으로 EU 국가 내에서 만든 상품이라면 관세는 면제). 프랑스 소비세가 붙은 가격인 TTC가 기본 설정이니, 사이트 우측 상단의 TTC/HT 버튼을 클릭해 소비세를 제외한 가격으로 보자.
TIP_2. 관세 면제가 적용되려면 EU 내에서 만든 상품이어야 한다. 나의 경우 특별히 요청하지 않았는데 인보이스 상에 원산지 관련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 불안하다면 결제 과정에서 원산지에 대한 문구를 꼭 기재해 달라고 미리 요청하자.
빼거나 더하고 싶은 와인은 없는지 점검하고 결제 옵션을 살펴봤다. 분명 최근에 카드 결제가 가능해졌다고 들었는데 결제 옵션에 계좌이체와 페이팔밖에 보이지 않았다. 직구 선배님들의 블로그를 돌아보고 와인 동호회 카페 질문란을 찾아봐도 도통 모르겠다. 오늘쯤 주문해야 기사 제출일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니 카카오뱅크 해외 송금을 이용하기로 하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입금해야 할 은행과 계좌 정보가 뜬다. 앗, 그런데 실수로 페이지를 이탈했다. 주문 내역에 들어가 다시 찾아보았지만 내가 고른 와인 리스트와 가격 말고는 결제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가능하다면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싶다고, 안 되면 계좌 정보라도 다시 보내 달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TIP. 배송 옵션으로는 기본 배송과 특송이 있다. 기본 배송(EMS/Colissimo)은 한 번에 6병까지만 간이 통관이 가능한 반면, 특송을 선택하고 DHL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면 12병까지도 괜찮다는 것이 직구 선배님들의 조언이다. 물론 특송은 배송료가 비싸다. 기본 배송으로 6병씩 두 번에 걸쳐 구매하면 187.24유로인데, 12병을 한꺼번에 배송할 시 특송 배송료는 210.12유로이니 43~44유로 정도의 차이다. 세금 책정에는 배송료도 포함되므로 본인의 필요에 따라 유리한 배송 옵션을 고르는 것이 좋겠다.
다행히 메일이 빨리 왔다. 답장으로도 계좌 정보를 보내주었고, 같은 정보가 담긴 자동 메일도 하나 와 있었다. 8일 안에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문이 취소된단다. 카카오뱅크로 419.85유로를 송금했다. 수수료는 5천 원. 상대에게 돈이 입금될 때까지 3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TIP_1. 신용카드 결제에 대한 질문에도 답이 왔다. 현재 밀레짐에서는 해외 고객도 신용카드 결제 이용이 가능하지만, 첫 번째 주문은 예외라고 한다. 첫 주문 시에는 해외송금이나 페이팔 등 현금으로 결제할 수단을 미리 준비해 두자.
TIP_2. 카카오뱅크 해외 송금을 이용했는데, 은행코드(BIC)를 입력하자 밀레짐 측에서 보내준 은행명(Banque Populaire Méditerranée)과 다른 이름의 은행(Banque Populaire Provençale et Corse)이 검색되어 잠시 당황했다. 일단 송금을 하고도 불안해서 두 은행의 정보를 찾아보니 2016년에 합병되었다고.
배송 정보를 받은 뒤 3일 정도가 흘렀는데 통관 관련 연락이 없다. 프랑스 우체국 사이트에 들어가 송장 번호로 추적을 해보니 내 와인은 마르세유 공항에 묶여 있었다. 공항 관제탑에 문제가 생겨서 소포들이 밀려 있단다.
TIP. 내 와인이 프랑스 땅을 떠나 잘 오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프랑스 우체국의 배송 추적 서비스를 이용해 확인해 보자. 밀레짐 측에서 보내준 배송정보 중 N° de Colis 항목의 알파벳+숫자를 입력하면 된다.
드디어 한국 우체국에서 카톡이 왔다. 내 우편물이 한국에 도착했으니 통관을 신청하라고. 함께 보내준 링크는 어쩐지 연결되지 않아서 전자통관시스템을 이용했다. 물품의 목록과 구매 목적, 가격 등의 정보를 기입하고 메일로 받은 인보이스를 첨부했다.
신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했을 때 분명 3-4일이 걸린다고 했는데 일주일이 되도록 아무 연락이 없어 조금 불안해졌다. 신고서에 뭘 잘못 기재했나? 가끔 심사 통과가 안 되어서 반송되기도 한다는데 혹시 그런 경우인가? 다시 전자통관시스템에 들어가 ‘심사 중’ 상태임을 확인하길 여러 차례, 6월 2일에 드디어 세금과 통관절차대행수수료 4천 원을 납부하라는 문자가 왔다. 배송료와 보험료를 포함한 총 구매금액이 419.85유로인데 세금은 27만 560원(약 200유로)이 나왔으니 47% 정도의 세금이 붙었다고 보면 되겠다. 은행 앱 공과금 납부를 이용해 세금을, 우체국 사이트에 들어가 수수료를 냈다.
TIP. 통관 상태를 알고 싶다면 전자통관시스템에 접속해 정보조회-통관정보-수입-우편물통관 진행 정보를 이용하면 된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 비행기 타고 온 것이 분명한 묵직한 박스가 나를 반긴다. 아, 드디어 도착했다. 처음 밀레짐 사이트를 탐색한 게 5월 5일이니 근 한 달 만에 구매 과정이 완료되었다. 몇몇 후기를 보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박스나 스티로폼에 손상된 곳은 없었고, 와인병과 레이블도 말끔했다. 셀러에 한 병 한 병 옮기고 가족들에게 ‘이 두 칸은 절대 나 없이 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긴 여정이었다. 통장의 출혈도 만만치 않았다. 신경 쓸 일이 많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와인 직구 또 할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 자주는 아니겠지만 정기적으로 사이트에 접속해보고 할인 행사가 있거나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와인이 눈에 띄면 구매를 고려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일 년에 두 번 정도, 기온이 극단적이지 않은 봄이나 가을이 되지 않을까. 6월 1일 밀레짐에서 보낸 메일에 따르면 여름 동안 와인을 구입할 시 가을까지 셀러에 보관해주는 무료 서비스를 시작한다니, 꼭 미리 확보해 둬야 할 와인이 있다면 이용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