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종식된 장밋빛 미래의 봄날,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 방문했다고 상상해 보자. 한때 궁전이나 귀족의 거처로 사용되었을 법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물. 표를 끊고 전시실로 들어선 당신의 눈앞에는 어떤 그림이 펼쳐지는가? 신과 왕, 미인, 자연, 정물? 혹시 그림 속 인물들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지는 않은가? 캔버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그러니까 술잔 말이다.
술, 특히 와인은 서양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다. 그리스 신화에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의 바쿠스)가 있고, 성경에는 예수가 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거나 제자들에게 ‘이것은 나의 피’라며 와인을 마시게 하는 내용이 있으니 서양의 문화예술에 와인이 녹아들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화나 성서까지 갈 것도 없다. 와인은 물보다 깨끗하고 영양이 풍부한 음료수로서, 혹은 도취와 흥분을 이끌어내는 기호품으로서 늘 유럽인들의 곁을 지켜왔으니까. 오늘은 유럽의 명화, 특히 19세기 작품에서 와인과 술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그림 속 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술을 마시는지 살펴보며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예정이다.
고급 샴페인의 대명사 돔 페리뇽의 이름이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 피에르 페리뇽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급자족을 기본 원칙으로 하던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성찬식에 사용할 목적으로―그리고 남은 것은 판매할 목적으로―꾸준히 와인을 만들고 발전시켜 왔으니 비단 샴페인뿐 아니라 유럽의 와인은 수도원 혹은 수도사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 세기 후반 독일 화가 에두아르트 폰 그뤼츠너(Eduard von Grützner)는 와인을 만들고 즐기는 수도사들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았다. 갓 따른 와인 잔을 손에 들고 그 빛깔을 감상하거나 향을 음미하는 수도사의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와인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임무였다지만 입가의 미소와 설렘으로 가득한 눈빛은 와인을 앞에 둔 여느 와인 애호가의 표정과 다를 바 없어 친근감마저 느껴진다.
오스트리아 화가 요제프 하이어(Joseph Haier)의 〈셀러의 수도사들(Monche in einem Weinkeller)〉은 한층 익살스럽다. 지나친 시음(?) 끝에 셀러에서 잠들어버린 젊은 수도사와 그를 일러바치는 수도사,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화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나이 든 수도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든다.
수도사들이 수도원 셀러를 관리하며 ‘덕업일치’를 즐겼다면 속세의 사람들은 바와 카페를 드나들었다. 마네(Édouard Manet)는 1882년 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Un bar aux Folies Bergère)〉에서 파리의 카바레-콘서트홀이자 19세기 사교 활동의 중심지였던 ‘폴리 베르제르’ 내부의 바를 묘사했다. 캔버스의 중심에는 종종 그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폴리 베르제르의 종업원 쉬종을 배치했는데, 카운터에 늘어선 샴페인과 각종 리큐어, 그리고 카운터 뒤의 거울에 반사된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쉬종의 넋 나간 듯한 표정이 이질적이다.
스페인 화가 라몬 카사스(Ramon Casas)도 파리의 술집이라는 공간의 흥겨운 분위기와 동떨어져 어색해하는 듯한 여성을 〈마들렌(Madeleine)〉에 담았다. 이번에는 종업원이 아니라 손님인데, 붉은색 상의를 입고 붉은 술 한 잔을 앞에 둔 이 여성은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불안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창문에 비친 홀의 모습을 잘 들여다보면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으니 바로 함께 춤을 추는 한 쌍의 커플이다. 그녀는 자신의 댄스 파트너가 다른 여성과 다정하게 춤추는 모습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문제적 음료, 압생트를 마시는 장면도 당대의 화가들에게 자주 포착되었다. 무용수 그림으로 잘 알려진 드가는 1876년 〈카페에서(Dans un Café)〉라는 제목의 그림을 내놓았는데, 잘 차려입은 여성이 연녹색 술을 앞에 두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혼을 병들게 할 만큼 독한 술이어서일까? 장 프랑수아 라파엘리(Jean François Raffaëlli)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들(Les Buveurs d’absinthe)〉 속 신사들도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나비파로 활동한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의 〈비스트로(Le Bistro)〉는 북적이는 비스트로의 바에서 급하게 술을 들이켜는 남성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이미 코가 빨개진 남자, 인파 사이로 팔을 뻗어 술을 주문하는 남자, 내 술은 어딨냐는 듯 삿대질하는 손가락과 정신없이 바쁜 바텐더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공기 좋은 데서 마시면 안 취한다고. 의학적 근거가 있는 말인지 놀러가서 한잔 걸치고 싶어 하는 변명인지 잘 모르겠지만, 19세기 유럽 화가들도 야외에서 음주하는 장면을 자주 그린 걸 보면 경치 좋은 곳에서 술 생각이 나는 건 만국 공통인 듯하다.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의 〈뱃놀이 일행의 점심(Le Déjeuner des canotiers)〉도 그런 정서가 잘 드러난 그림 중 하나로, 뱃놀이 후 센강의 선상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양껏 먹고 마시는 한 무리의 예술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느긋한 기분이 든다.
옥타브 타사에르(Octave Tassaert)는 〈와인 잔을 든 젊은 여인(Jeune Femme au Verre de Vin)〉에서 숲속에 앉아 와인 글래스를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림 속 여성은 와인 잔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을 감상하려는 듯 팔을 높이 치켜들고, 크게 뜬 눈으로 잔을 응시한다. 의자 옆에 놓인 술병에 남은 술의 양으로 보나 뒤로 편안하게 기대앉은 자세와 살짝 붉어진 뺨으로 보나 이미 꽤 취한 것이 분명하다.
헝가리 화가 시네이 메르세 팔(Szinyei Merse Pál)은 5월 피크닉의 한때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한 커플, 밀당(?) 중인 듯한 또 다른 커플 그리고 엎드려서 뭔가를 먹고 있는 남자와 술이 모자란 듯 나무 그늘 아래서 한 병을 더 가져오려는 남자. 짝 없이 소풍 나온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과 술이 충분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