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프랑스, 첫 보르도
13.JUL.2019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왔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처음, 직장을 다니면서 휴가를 내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도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다. 7시 퇴근 후 아침 비행기를 기다리며 짐을 싸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고, 중간에 짜증을 내며 세 번 정도 드러누웠다. 떠나는 짐을 싸는 일은 늘 돌아오는 짐을 싸는 것보다 어렵다. 돌아올 땐 가져간 물건만 잊지 않고 챙겨 오면 되지만 떠날 때는 뭐가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을지를 결정하고, 집안 구석구석에서 물건을 찾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가방에 담는 일까지 해야 하니까. 다시 일어나야 할 시각을 세 시간 정도 남기고 여행가방이 완성되었다.
비행시간 두 시간 삼십 분 전에 도착한 공항은 극성수기인 것을 감안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대한항공-에어프랑스 공동운항이었는데, 사실 어젯밤에 연착을 알리는 문자를 받은 터였다. '5년 만에 돌아가는 프랑스, 출발부터 너답구나'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나마 미리 알려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보르도행 TGV도 웃돈을 주고 미뤄두었다.
에어프랑스의 장점 중 하나는 후한 술 셀렉션이다. 이코노미에서도 식전주로 샴페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드라이한 스파클링 와인)을 준다. 레드와 화이트는 물론 있고, 식후에 꼬냑을 달라고 하면 꼬냑을 준다!
집 보증금을 떼인 채 찝찝하고 망한 기분으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 비행기에서 식전주로 샴페인, 식사와 곁들여 레드, 식후에 꼬냑을 요청하자 에어프랑스 스튜어드가 매우 흡족해한 기억이 있다. 여행을 갓 마치고 프랑스 식문화에 푹 빠진 동양인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이제 한국에 가면 비싼 돈을 내고 마셔야 할 술을 마지막으로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그는 나에게 각종 리큐어 미니어처를 추가로 가져다주면서 말했다."얘네도 마셔봐, 마음에 들거야." 공짜 술을 잔뜩 얻었으니 이러나저러나 기분이 좀 나아졌다.
꽤나 피곤했는데, 어쩐지 비행기에서는 30분 정도의 얕은 잠만 잤다. 일주일 남짓의 유럽 여행 치고 살짝 빠듯한 일정과 와인 수업, 시험을 포함한 빡빡한 스케줄, 그리고 귀국 다음 날 바로 해야 하는 출근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이런저런 영화를 돌려보고 있자니 샤를 드골에 도착했다.
유심을 사서 끼운 뒤 짐을 밀고 공항 TGV역으로 향했다.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서두르면 원래 기차 시간에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리가 남아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결제를 취소하고 다시 예약할 시간적 여유는 없지 싶어서 공항 내 PAUL에 자리를 잡았다. 끈끈하고 농도 짙은 공기의 실내에는 사방에 흩어진 빵가루를 노리는 참새가 날아다녔고, 나는 다시 프랑스에 왔음을 실감했다.
프랑스, 특히 파리는 내게 애증의 공간이다. 사실 유학 이후로는 '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항상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일상이 너무 피곤했다. 누구랑 싸우냐고? 거리의 레이시스트, 소매치기, 체류증 발급을 담당하는 경시청 직원,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오히려 나를 협박하던 집주인과 방관하는 부동산 중개인까지. 어느 정도 수준이 된 후로 더 이상 늘지 않는 프랑스어와, 프랑스어로만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과 보내는 저녁시간은 나를 더 지치게 했다.
한국에 온 뒤로 한 번도 프랑스가 그립지 않았다. 가끔 특정한 순간이나 날씨, 언제든 기차를 타고 주변 나라로 떠날 수 있는 여건이 그립기는 했지만 누군가 "프랑스로 돌아갈래?"라고 물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5년 만에 프랑스에 올 수 있었던 건, 함께 와인에 취미를 붙인 친구가 보르도에 가서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따자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험을 한국에서도 치를 수 있었지만 휴가 겸 보르도에 가서 와이너리 투어도 하고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와인을 시음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보르도는 파리가 아니니까, 보르도가 좋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으니까. 파리 땅은 밟지도 않고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보르도로 도망치기로 했다.
기차 시간이 다가와 데일리 모놉(프랑스 슈퍼마켓 체인 '모노프리'의 소규모 점포로, 물건 종류는 적지만 일반 마트보다 늦게까지 영업한다.)에서 꾸스꾸스 두 개를 샀다. 나는 연어 아보카도 꾸스꾸스, 친구는... 뭐였더라?
기차에 올라 고픈 배를 채우고 나니 잠이 몰려왔다. 파리에서 출발하는 두 시간짜리 보르도행 TGV와 달리 샤를 드골 출발 열차는 세 시간 오십 분이나 걸려 우리를 보르도로 데려다주었지만 자느라 길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유리창에 머리를 박으며 자다 잠시 깨서는 창밖 노을 사진을 찍었고, 사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다시 구도를 잡을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복도 쪽에 앉은 친구의 고개도 자꾸 의자 밖으로 떨어졌다. 마주 앉은 프랑스 여자가 사진을 찍지 않았기만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