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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적 앞에는 장이 열리고

by 페쉬플랏


14.JUL.2019. 오전 동네 산책과 Pallais Gallien

보르도는 생각보다 크다. 우리 집은 시내 중심가에서 도보로 20분 거리, 월요일부터 3일간 수업을 듣기로 되어 있는 와인 캠퍼스에서 도보+버스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2층 주택이다. 여행에서 접근성이 주는 편리는 익히 알지만, 잠귀 밝고 예민한 우리 둘이 각자의 공간을 가질 수 있으면서 예산에도 맞는 집을 찾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미리 연락해 미뤄둔 시간보다도 30분 정도 늦게 도착해 미안했는데, 호스트인 아니와 다니엘은 보르도와 근교에서 둘러볼만한 곳, 근처의 괜찮은 식당들과 집안의 집기들을 성의껏 소개해 주었다. 호들갑 떠는 환대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언제나 집에 돌아갈 때쯤이 되어서야 겨우 여행지의 시간과 침구에 몸을 맞추는 나인데, 각자의 방을 정하고 구겨질 법한 옷들을 걸어둔 뒤 따듯한 물로 씻자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날이 밝자 곳곳이 더 명료하게 보인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에서 나기 마련인 특유의 먼지 냄새, 바닥과 창문의 나무 냄새는 처음에는 찝찝해도 곧 익숙해지고, 시간이 흐르면 따듯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아니와 다니엘의 집은 낡았지만 깔끔하고 세심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거실 쪽 찬장에 가득 찬 갖가지 유리잔과 식기들이 왠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 둘이서 그걸 다 꺼내 쓸 일은 없겠지만.


아니와 다니엘이 준비해준 갈레뜨를 곁들여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다 보니 친구가 일어났다. 우리는 대충 옷만 갈아입고 동네를 구경하러 나선다. 보르도는 새 트람 노선 공사가 한창이다. 모노프리 앞에서 오픈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역시 문 열기를 기다리던 멋진 차림의 할머니가 9시가 되어야 연다고 서툰 영어로 웃으며 사과했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배고픈 이방인들이 앞으로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모양이다. 괜찮아요. 일요일인 데다 혁명 기념일인데, 뭐라도 살 수만 있다면야 감사하죠.


우리는 조금 더 멀리까지 걸어갔다가, 빵집에서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사들고 돌아왔다. 모노프리에서는 토마토와 후무스, 달걀과 물, 그리웠던 납작 복숭아(!)를 샀다.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인 'Palais Gallien'에서 열리는 주말 장. 한 때 2만 명의 관객을 수용하던 경기장은 17세기에는 부랑자와 매춘부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말에 열리는 야외 장도 구경해보고 싶어진 우리는 집에 짐을 두고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걷는다. 무려 로마 시대 유적인 빨레 갈리앙(Palais Gallien) 앞에서 열리는 것 치고는 간소한 장이다. 일렬로 늘어선 색색의 채소와 과일들이 마트 안에서와는 다른 빛을 발한다. 투실한 가지는 검정에 가까운 보랏빛으로, 길쭉한 토마토는 붉은빛으로 반질반질. 달콤한 냄새에 못 이겨 납작 복숭아를 추가로 장바구니에 넣고, 브리치즈도 샀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공산품이 아닌 치즈를 사본 적이 없다. 100 그램이 대체 얼만큼인지 몰라서, 가격은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어서. 이번에는 손가락을 살짝 벌려 "이만큼만 주세요"하고는 조각 케이크 만한 치즈 덩이를 받아왔다. 그동안은 왜 못한 거지. 이렇게 쉬운데 말이야.


카페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 하면 딱일 것 같은데, 휴일이라 연 데가 또 PAUL 뿐이다. 종이컵에 받아온 에스프레소를 테라스에서 마시면서, 빵가루를 찾는 비둘기가 내 다리 사이로 지나다닐 때마다 조금씩 기겁하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의논했다.




14.JUL.2019. 오후 Cité du Vin

씨떼 뒤 방La Cité du Vin은 2016년 6월, 보르도에 문을 연 일종의 와인 박물관이다. 포도나무의 가지와 잔 안에서 돌아가는 와인, 그리고 가론 강의 소용돌이를 표현했다는, 언뜻 보면 거대한 디켄터 같기도 한 외관이다. 안은 꼼꼼히 본다면 한나절이 꼬박 걸릴 콘텐츠로 가득하다.


와인 박물관이라고 해서 유명 샤토들의 오래된 와인들이 전시되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와인에 대한 지리적 상식부터 아로마, 빛깔 등을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전시로 꾸며져 있다. 논문 자료를 찾겠다고 국립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에 인쇄된 사진을 장갑 끼고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던 나로서는 올~프랑스~ 이런 것도 해~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그러고 보니 데이터가 있어도 인터넷 사용이 쉽지 않던 TGV에서도 와이파이가 팡팡 잘 터지고 있었다.


술 관련 전시관들이 으레 그렇듯 맨 꼭대기에는 보르도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간이 바가 마련되어 있었고, 티켓으로 한 잔씩 시음을 할 수 있었다. 와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내 앞의 프랑스 아저씨가 받은 와인을 킁킁대더니 ‘부쇼네(코르크에 의해 상한 와인)’라며 다른 병에서 따라 줄 것을 요청했다. 바텐더는 별 말없이 다른 병의 와인을 따라주었지만 아저씨가 자리를 떠나자 곧바로 동료와 험담했다. 그 와인이 진짜 부쇼네였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나는 단 맛의 소테른(귀부병에 걸린 포도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을, 친구는 부르고뉴 레드를 골랐다. 단 술은 물론이고 단 맛이 강한 어떤 음식도 즐기지 않는 편인데 소테른은 마실 때마다 눈이 번쩍 뜨인다. 적당한 산미가 단 맛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잡아주어 풍부한 열대과일 향을 마음껏 즐기기 좋다. 나중에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저 달기만 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소테른도 많단다. 나는 지금껏 운 좋게도 잘 만든 소테른만 마셔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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