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JUL.2019. 저녁
씨떼 뒤 방을 관람하는 데는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기념품 샵에도 들르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와인에 담긴 향을 잘 맡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네 뒤 방( Nez du vin, 영어로 직역하면 Nose of wine),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돕는 와인병 커버, 한 번 연 병 속의 와인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마개 등 욕심나는 물건이 많았지만 소믈리에 나이프 하나만 골랐다. 와인을 숙성시켰던 오크통 나무로 손잡이를 만든 나이프인데, 한 면이 와인으로 물들어 있다. 고급스러운 모양새도 아니고 촉감은 거칠지만 처음 쓸 때부터 손에 자연스럽게 붙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이 오크가 어디서 어떤 와인을 숙성시켰을까 생각하게 되는 점이 흥미롭다.
아로마를 체험해 보는 공간에서 코를 들이밀고 너무 열심히 맡았는지 두통이 몰려왔다. 씨떼 뒤 방 앞의 벤치에 앉아 저녁 먹을 곳을 찾고,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걷기로 결정했다. 걸으면서 컨디션이 나아지기 시작할 즈음, 뒤에서 익숙한 술렁임이 느껴졌다. 프랑스 거리를 여러 번 걸어본 동양인 여자라면 누구나 감지할 수 있을 그 기분 나쁜 술렁임. 축구 경기를 앞두고 들뜬 한 무리 남자들의 입에서 어김없이 쉬누아즈(차이니즈), 곤니찌와 같은 단어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틀렸어 멍청이들아. 속으로 험한 욕을 하고는 빨리 걸어서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냥 장난치는 건데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내느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아, 거기까지 들어가진 말자. 이건 보르도 여행기니까.
"라 브라스리 데 샤트롱(La Brasserie des Chartrons)"이라는 이름의 식당은 주변의 다른 가게들에 비해 꽤 붐볐다. 우리는 테라스 근처의 높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새우, 관자 등의 해산물 요리와 '남서쪽 샐러드'를 주문했다. 남서 지방 샐러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어쩐지 남서쪽 샐러드가 더 입에 붙는다. 남서쪽 샐러드에는 푸아그라와 오리 가슴살, 닭 모래집이 들어있었다. 유학시절 마트에서 모래집을 파는 걸 보고 신기해서 사 왔던 기억이 났다. 한국에선 잘 먹지도 않던 닭모래집 볶음이 갑자기 먹고 싶어져 요리했다가 처참히 실패했던.
7월 14일은 혁명기념일, 프랑스 국경일이다. 해가 지고 나면 프랑스 전역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지금까지는 파리 에펠탑 주변의 불꽃놀이만 봐왔는데, 갸론 강가의 불꽃놀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식당을 나와 강을 따라 도시의 아래쪽으로 걷는다. 정확히 어디에서 불꽃이 터지는지 들은 바가 없어도, 몰려나온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면 된다.
혁명기념일 불꽃놀이는 열 시 반부터라고 공지하고 실제로는 늘 열한 시쯤 시작한다. 배가 부르자 극도로 노곤해진 나는 이번만큼은 정말 열 시 반에 시작하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품어보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쉼 없이 재잘대던 프랑스 청소년들 옆에 앉아, 10 분 뒤에도 시작하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자고 친구와 세 번쯤 약속했을 때 첫 번째 불꽃이 터져 나왔다.
깜깜한 밤하늘에 색색깔 불꽃이 터지는 광경은 언제, 어디서 몇 번을 보아도 매혹적이다. 하지만 나는 늘 집에 돌아갈 일부터 걱정하는 현실주의자라서 (다행히 친구도 그렇다) 열한 시 십오 분쯤 미리 우버를 불러 빠져나왔다. 알제리 사람들이 네이션스컵 4강전 승리를 기념하며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화포를 실은 바지선에 불이 붙는 바람에 갸론 강가의 불꽃놀이는 예정보다 일찍 중단되었다고 한다. 대신 바캉스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다시 불꽃을 쏘아올렸다고. 실망했을 시민들을 위해 불꽃놀이를 한 번 더 준비한 마음이 귀엽기도 하면서 어딘지 조금 못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축제는 끝났어.이걸 보고 나면 좋든 싫든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해, 라고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