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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와인 열세 개를 맛보면

by 페쉬플랏

15.JUL.2019 8h00-18h00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시내 중심가로 나가 버스를 타고 다시 십 분 정도를 걸어야 수업을 듣기로 한 와인 캠퍼스에 도착할 수 있다. 생각보다 도보로 걷는 시간이 길었고, 트람 공사 때문에 버스 정류장이 바뀌어 있었다. 방향이 맞는지 몰라 망설이던 차에 타야 할 15번 버스를 눈앞에서 놓쳐버렸다. 우버도 잡히지 않고, 짜증과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 수업 시간을 잘 지켜달라는 와인캠퍼스 측 안내 메일이 떠오르자 얼굴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다음 버스가 예정된 시간에 와줬고, 우리는 15분 정도 늦게 강의실에 도착했다. 조용히 맨 뒷자리에 앉아 책과 워크북을 펼치자 그제야 마음이 약간 놓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억양이 너무 심하다. 친구와 서로 가능한 스케줄에 맞추어 분명 영어 수업을 신청했는데, 지금 마띠아스 입에서 나오는 저것은 프랑스어인가 영어인가.. 그는 스펠을 불러줄 때 자꾸 J를 '지'로, G를 '줴'로 발음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프랑스어, 영어 패치가 머릿속에서 한 데 엉켜 춤을 춘다. 이럴 바에 차라리 프랑스어로 해줘요...

첫날부터 열세 개의 와인, 그리고 지옥을 맛봤다. 자리마다 놓여있는 까만 통이 맛본 와인을 뱉는 스피툰(spittoon)이다.

와인을 시음하는 방법, 와인의 아로마를 묘사하는 단어들에 대해 차례로 배운 뒤 본격적인 시음에 들어갔다. 향과 맛만 느끼고 뱉었어야 하는데, 입 안에 술을 넣었다 뱉어본 적이 없는 나는 그대로 몇 모금을 삼켜버렸다. 아깝잖아 술... 한시간 쯤 흐른 뒤, 나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거의 빈 속이었던 탓인지, 아침부터 버스 때문에 신경을 쓴 때문인지 속이 시큰하게 쓰렸다. 빨리 점심을 먹어야 해.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점심도 굶었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샐러드와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주문이 잘못 들어갔다, 요리하는 사람이 한 명뿐이다, 하며 기다려 달라고 몇 번 이야기하더니 결국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맞추지 못하겠다는 거였다. 심지어 웬 노망난 할배가 성큼성큼 다가와 우리 테이블 꽝! 내려치더니 껄껄껄 웃으면서 지나갔다. 아, 속이 더 심하게 쓰려온다.


결국 옆에 있던 구멍가게에서 바나나를 하나씩 사들고 베어 먹으며 강의실로 돌아왔다. 와중에 바나나는 또 되게 맛있었다. 오후 수업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필 극강의 산도를 자랑하는 와인들만 맛봤다는 것 외에는. 시음한 와인은 모두 뱉었지만 머리는 팽팽 돌고 입안은 시고 계속 명치께가 아팠다.


15.JUL.2019 18h00-21h00

저녁은 제대로 먹어야만 했다. 평이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아가기로 했는데 7시 30분이 되어서야 문을 여는 곳이었다. 평소 같으면 테라스에 앉아 식전주를 마셨겠지만 도저히 술도, 신맛이 나는 그 무엇도 입에 댈 수가 없어 아이스크림 가게에 자리를 잡고 코코넛과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주문했다. 당도가 혀를 진정시키고 혈당 수치까지 조금 높여주자 그제야 정신이 들어, 아담한 광장에서 연주하는 버스커의 음악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둘이서 나눠먹었는데도 배불렀던 L'Artigiano Mangiatutto의 살라드 판타지아.

식사는 훌륭했다. 친절한 이탈리아인 사장님은 추천을 부탁하자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무려 메뉴 전체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는 애피타이저로 살라드 판타지아를, 본식으로 쉐브르(염소 치즈)가 들어간 라비올리와 트러플 파스타 주문했는데 이게 웬걸, 샤퀴 테리가 잔뜩 올라간 살라드 판타지아를 다 먹고 나니 벌써 배가 불렀다.


뒤늦게 나온 파스타를 향한 우리의 포크질이 점점 느려지자, 센스 있는 사장님은 "배부른 것 같은데 포장해줄까?"하고 물었다. 자신의 요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기 힘든 것도 같았다. 친구는 먹게 될지 모르겠다며 망설였지만, 나는 레프트 오버를 아주 좋아하므로 당장 그러자고 했다. 한 번 식은 음식을 다시 데워먹으면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다음날 아침, 나는 더 이상의 과도한 위산 발생을 방지한다는 비장한 명분으로 라비올리를 데워먹었고 여전히 꼬들꼬들 맛있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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