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꿈을 꾼다.
항상 굉장히 많은 꿈을 꾸기 때문에 언제 한 번은 매일매일 꾸는 꿈을 기록해서 책으로 내보면 어떨까 생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장르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꿈을 꾼다. 대부분은 아침에도 선명하게 생각이 나는 꿈으로, 오후가 되어서 '아, 이러려고 그 꿈을 꾸었구나!'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예지몽은 아니지만.
그런 내가 언제나 꿈에서 보는 집이 있다. 꿈에서는 늘 같은 집과 같은 동네 같은 거리가 나온다. 한남동 집과 그 집 앞의 골목이다. 한남동 집은 내가 기억하는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도 몇 년 있다가 엄마 아빠가 이사를 가셨으니 나의 모든 추억은 그곳에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남동 집은 두 개다. 중간에 새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새로 짓기 전의 집은 낡은 일본식 2층 주택이었다. 실제로 일본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이 집은 모든 통로가 좁았다. 어렸던 나도 좁다고 기억하고 있으니까 실제로 꽤 좁았을 것이다. 집안의 모든 바닥과 벽과 천장이 진한 갈색 나무였던, 그래서 걸을 때마다 삐그덕 거리던 그 나무집은 내 나이 아홉 살 때 간단히 부숴버리고 새로 지었다. 부잣집 친구네서 딱 한 번 보았던 양변기 화장실이 드디어 우리 집에도 생기는 건가 싶어서 설렜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가정집에 양변기까지는 없었다. (물론 수세식 화장실이기는 했다.) 그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집요하게 받았던 교육이 양변기 교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도록 양변기에서 용변을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절대다수였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야심 차게 새로 지었다는 최신식 화장실로 그 많은 아이들이 몇 번이나 줄을 지어 가서는, 선생님의 양변기 사용법에 대해 귀와 눈에 딱지가 앉도록 보고 들어야 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궁금할 것이다. 대체 몇 년 생인지. 이건 60년대 얘기인가 싶을 것 같아 밝히자면 나는 서울 태생의 1974년 생이다.)
새로 집을 짓는 동안 세 들어 살던 근처 지하방도 생각난다. 아주 좁은 단칸방에 세간을 다 욱여넣고, 엄마, 아빠, 언니와 나 네 식구는 그야말로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잠을 잤다. 그 작은 방과 작은 부엌에서 엄마는 석 달 넘게 매일 세끼 인부들의 밥을 해다 날랐다. 사이사이 두 번 술과 안줏거리도 해다 날라야 했다. 그걸 대체 어떻게 해내셨을까?
새로 지은 집은 번듯해 보이는 이층 집이었다. 나중에 아빠는 입버릇처럼 집을 잘못 지었다고, 그로 인해 사는 동안 얼마나 고달팠는지 말씀하시곤 했지만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린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새로 지은 집의 난방 시스템을 기름보일러로 바꾸기 전까지는 연탄을 땠는데, 추운 겨울밤과 새벽에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때 갈아야 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두 번씩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옷을 여미며 현관문을 나서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나도 잠결에 몇 번은 보았다. 지금에서야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를 생각한다.
우리 집을 거쳐간 많은 세입자들과 또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던 엄마의 모습도 선명하다. 그때는 한 지붕 아래 살면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있던 때였다. 나는 각종 음식을 들고 줄곧 심부름을 다녔다.
지역이 한남동이라 그랬는지 외국인 세입자도 간혹 있었다. 2층에 살던 미국 사람이 만들어줘서 처음 맛보았던 마카로니 치즈와 컵케익!!! 엄청나게 황홀했다. 그것을 또 만들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또 바랐다. 단 한 번이었던 바닐라향의 파란색 컵케익은 아직도 잊지 못해. 미국 사람이 살던 2층 언저리만 가도 풍기던 달콤한 고급스러운 향기도 어린 시절의 나를 관통했다.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황홀한 이 향이 바로 미국의 냄새구나 했다. (그 향의 정체가 다우니 향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은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막다른 골목의 끝에는 3층 집(부잣집)이 버티고 있었고, 그 바로 전이 우리 집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살면 사실 위험하다고, 도둑이 도망가다가 막다른 골목임을 알게 되면 우리 집 담을 넘어서 숨을 것이라고 떠들던 동네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는 또 한동안 밤마다 두려워했었다. (실제로 두 번이나 도둑 든 적이 있다.) 항상 높은 문이 굳게 닫힌, 하지만 철망 사이로 깔려있는 잔디가 보이는 막다른 골목의 으리으리한 하얀 3층 집도 꿈에 나온다. 여전히 접근하기 힘든 부잣집으로. 꿈에서조차 그 집 마당을 한 번도 못 들어가 봤다.
말한 대로 우리 집 앞 골목은 막다른 골목이기 때문에 차 출입이 없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놀기에 최적이었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곳, 배드민턴을 쳤던 곳, 땅따먹기와 고무줄놀이를 했던 곳, 축구를 했던 곳도 모두 그 골목이었다. 저녁을 먹고 씻고 자려고 잠옷을 입고도 밖이 궁금해서 대문 밖을 나서면 그때까지도 어김없이 있던 동네 친구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집을 떠올리면 화분이 그득한 마당도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어느 날 아빠가 어디서 얻어왔다는 개가 마당 한쪽에 묶여있었다. 일곱 살 때였는데 개에게 고기를 주다가 손을 크게 물려서 병원에 보름 넘게 다녔더랬다. (아직도 손등에 그때의 흉터가 있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팠는지는 모두 잊었지만 그 개는 기억 한다.
아이를 문 개는 살려둘 수 없다고 동네 아저씨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잘못한 거라고, 개는 잘못 없다는 나의 외침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식빵을 던져 넣은 포대자루에 개가 넣어져 잡혀갈 때 본 바둥거리던 개의 짜부라진 눈. 마침 우리 집에 와 계시던 외할머니는 그렇게 끌려가던 그 개의 털을 기필코 한 움큼을 뽑아와서 그 털을 태운 걸 손등에 발라주셨다. (병원에서 알면 기절할 일이다.)
크지 않은 마당에는 각종 나무도 심어져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한 나무는 단연 살구나무다. 봄이면 마당에 가득 떨어지던 살구나무 꽃 비. 살구가 가득 열려서 먹다 먹다 지쳐서 쨈을 만들던 살구. 또 높이가 4미터는 될 것 같던 향나무도. 벼루에 넣고 먹을 갈 때 향나무 열매를 넣으면 진하고 좋다고 해서 향나무 열매를 따던 일도 있었다. 또 우리 집 마당을 거쳐간 강아지들과 항상 이름이 나비였던 길 고양이들.
유년시절의 추억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모든 꿈의 배경은 그곳이다.
때때로 이태원을 가도 굳이 들르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 한강진역에 간 김에 우리 집으로 가보았다. 이태원과 한남동의 격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집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마치 꿈속에서 본 곳을 처음 와본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 꿈에 여기 맨날 나왔었어. 이러면서 잠시 서성이다가 왔다.
살구나무는 그대로인가.... 그대로구나. 이 집 사람들도 매년 살구를 잔뜩 먹겠구나. 향나무는 없어졌구나.....
벽돌도, 대문도, 담장 위 뾰족 철망도 그대로다. 2층 올라가는 외부 계단도 꿈에서 너무 자주 나온다. 늘 세입자가 살아서 함부로 올라가진 못했기에 꿈에서도 2층에 올라가는 걸 조금 주저한다.
옛날 사진첩을 보면서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유일한 '내 집'을 추억한다.
집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내가 여섯 살 때의 사진이다. 옛날 골목 바닥과 축대.
뒤로는 부잣집이던 하얀 3층 집이 있다.
왼쪽으로는 축대가 있어서 저 축대에다가 축구공 엄청 차고 놀았지. 오른쪽으로 조금 보이는 집이 우리 집.
새 집을 짓기 전의 낡은 주택이던 우리 집이다.
새로 집을 지으면서 건축법에 따라 땅을 상당히 많이 내놓고 들여지어야 해서 엄마 아빠가 속상해했던 기억이 있다. 뛰노는 골목은 덕분에 꽤 넓어졌지만.
옛날 집의 마당. 옛날 집의 대문......
옛날에는 화분들이 대부분 토분이었구나...
엄마는 이 많은 화분들을 다 어떻게 키우셨을까.
일곱 살의 나......
나의 아들 은찬이가 이 사진을 보고 "이건 엄마 티가 나."라고 했다. 지금과 닮았다는 말이겠지.
이제는 나도 식물을 제법 많이 키운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보면 엄마가 키우시던 식물이 그렇게 눈에 쏙쏙 들어온다.
역시 내가 일곱 살 때인데, 마당에 저렇게 돗자리를 펴놓고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이 사진을 찍던 날이 생각나는데, 이날은 언니 초등학교의 운동회 날이었다.
그래서 아마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있었던 거겠지.
운동회가 끝나고 오자마자 체육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언니가 소꿉놀이를 하자고 해서 신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언니가 주도하기 때문에 세팅을 할 때 부러워하며 보는 내가 사진에 찍혔다.
마당 가득 심어놓은 토란은 무럭무럭 자라서 잎이 엄청나게 커졌다.
일곱 살의 나는 우산 같은 토란잎을 항상 좋아했는데, 필름이 남아있으니 사진 찍자고 하셔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토란잎 위쪽에 오목한 곳에 물을 담으면 너무 이쁘게... 기름에 뜬 것처럼 움직이는 게 좋아서 자주 물을 뿌리고 놀았다. 지금은 나도 토란을 키운다. 비록 화분이지만.
집 안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나는 라디에이터를 사랑했다.
사진으로 보면 피아노 다리도 보이고 무지 잘 사는 집 같지만 전혀 그렇진 않았다.
집 짓느라 얼마나 쪼들렸는지, 같은 공간에 있던 (미래의 내) 방을 세를 놓는 바람에 한동안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
그 당시의 나는 (그때 제일 비쌌던) 300원짜리 다이제스티브 과자를 사 먹고 싶어서 부자였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그게 안 되면 외동이었으면 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무척이나 쪼들려하는 걸 알던 아홉 살이었다. 그래서 다이제스티브를 사달라고 한 번도 조르지 않았다. 어쩌다가 손님이 오셔서 백 원이건, 이백 원이건 주시면 그걸 쓸 때 쓰고 모아서 다이제스티브를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일주일 넘게 야금야금 먹었다.
이런 기억을 내 아이는 가질 수 있을까?
뭔가를 늘 풍족하게 사주진 않지만, 먹고 싶은 과자가 비싸서 사 먹지 못하는 일은 없으니까.
1998년의 사진이다. 나는 이미 직장인이 되었고 결혼을 3개월 앞두고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나의 개와 노는 사진이다. (나의 개 맞다. 결혼하면서 데리고 가서 늙어 죽을 때까지 키웠다.)
이 사진을 보고 새삼 엄마가 얼마나 화분을 많이 키웠던가 놀랐다. 집안에도 한가득이었다. 겨울에는 저걸 다 어떻게 집 안으로 들였을까... 화분들도 다 저리 큰데. 엄마는 무슨 여력으로 이토록 많은 화분을 다 키우셨을까...
오래간만에 옛날 사진첩을 보며 추억에 잠겼던 며칠이었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기억들..... 내 아이는 그런 걸 가지고 있을까, 커서도 또 꿈에서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내 아이도 나처럼 낡은 집과 새로 지은 집을 경험했다. 요즘 아이들이 갖지 못하는 드문 경험이다. 아이가 다섯 살 중반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새로 지었는데, 사진을 보여주어도 옛날 집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섯 살에게는 무리인 건가. 겨울이면 집에서도 패딩을 입고 있어야 하고, 자고 일어나면 마루에 떠놓은 물에 살얼음이 낄 정도였던 낡은 단독주택의 기억을 내 아이도 가지고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가을마다 감이 몇 백개씩 열리던 감나무는 어떻고. 그것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다섯 살 때부터 사는 이 집에서라도 많은 추억을 쌓기를 바란다.
엄마가 키우던 많은 식물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비가 내릴 때마다 옥상의 화분을 걱정하는 아이는 아마 기억해 줄 것이다. 동네 친구는 없지만 옥상에서 엄마와 아빠와 쌩쌩이 대결을 하던 것, 옥상에서 바라보던 북한산의 모습, 옆집의 지붕으로 올라오는 고양이들과 그 고양이들을 나비라고 부르면서 마루의 창을 열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것들도 평생 기억해 주었으면.
작고 반짝이는 일상이 잔뜩 녹아든 집, 그런 집이 꿈에서 보는 집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