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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 느낌

아빠의 철근 고리

by 현주

브런치 첫 글로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대해 썼었다.

https://brunch.co.kr/@zoo430/1


위의 글에 나오는 집은 내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25살 결혼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엄마 아빠는 몇 년 더 이 집에서 사시다가 경기도로 이사 가셨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빼면 나의 모든 추억이 녹아있는 유일한 곳이라서 더 각별하다.

아홉 살 때 쓰러져가는 집을 새로 지어서 기억 속에는 두 개의 집이 있긴 하지만, 서울에서 이렇게 한 곳에 계속 사는 일은 매우 드물다.


최근에 이 집에 다시 가보았다. 2013년에 한 번 가보고 7년 만에 다시 가본 것이다.

빵을 사러 이태원에 갔다가 들러본 것인데, 마침 공사 중이라서 들여다보기까지 할 수 있었다.

이태원과 한남동이 뜨면서 주택들이 속속 상가로 개조되는 와중에서도 막다른 골목의 집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옛날 우리 집의 앞의 앞까지 브런치 가게로 바뀌어있다.


이태원에서 한남동 쪽으로 가는 길은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그래도 기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낼 구석은 남아있었다. 꿈에서 보던 골목과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곳들을 더듬었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의 주인공처럼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면서 '어머어머! 여기가 거기잖아, 아직도 있어!' 등등의 멘트를 날렸다.

주택들은 이미 예전에 다가구 주택으로 바뀌었는데, 그 다가구 주택의 반지하층은 모두 상가로 개조되어서 평일에도 손님들이 있었다. 반가움과 낯섦의 중간쯤 되는 마음이었다.


20201027_133736.jpg 왼쪽에 차량 진입금지 오르막을 지나면 더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 있고 거기를 올라가면 한강진역이 나온다. 오른쪽 골목이 우리 집이 있는 막다른 골목이다.


16년 간의 학창 시절 동안 나와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우리 집에 왔었다.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해주시는 간식을 먹으면서 뒹굴거리다가 갔고, 몇은 시험기간에 공부를 핑계로 우리 집에서 살기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등교할 때 매일 버스를 타러 왼쪽의 저 오르막을 올랐다. 버스정류장 이름은 '구 면허시험장 입구'였다. 한남동 운전면허시험장이 지금의 한강진역 근처에 있었기 때문인데, 언젠가 시험장이 사라지고 정류장 이름에 '구'자가 붙었다.

이 정류장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길이 밤에는 어둡고 무서워서 다음 정거장인 '단국대학교 입구'에 내려서 비교적 덜 어두운 길을 걸어올 때도 많았다. (몇 년 전까지 한남동에 단국대학교 캠퍼스가 있었다.)


저 오르막에서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도 나를 많이 기다렸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라서 대충 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 전에 와서 기다리기 시작하는데, 미리 약속이 되어있지 않으면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친구들하고 놀다 올 때도 있고, 공부를 더 하고 올 때도 있었다. 그러면 적게는 한 시간, 많을 때는 꼬박 다섯 시간도 넘게 기다리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서 늦게 온 사람은 오히려 화를 냈고, 기다린 사람은 괜히 말도 없이 와서 기다려서 미안하다고 달래주었다.


20201027_133844.jpg 내가 아홉 살 때 새로 지은 집이다. 이 집도 벌써 37년이나 되었다.


20201027_134408.jpg 2층 난간에서 두 번을 뛰어내리면 대문 위쪽으로 올 수 있었다. 거기서 골목의 친구들과 물싸움도 하고, 공 던지기도 했다. 아직도 저길 그렇게 타 넘고 뛰어내리를 꿈을 꾼다.


KakaoTalk_20201120_135113763.jpg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다리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이 있다. 저 사다리는 지금 우리 집에서 사용 중이다.


대문 위의 공간에도 엄마의 화분들이 잔뜩 놓여있다. 나는 저 담장의 가시 철망에 매달려서도 잘 놀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높은데 올라가서 곧잘 매달려 있었다. 철봉에 한번 올라가면 어지간해서는 내려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 같으면 절대 못하게 했을 행동도 엄마는 내버려두셨던 기억을 하면 지금 나는 너무 아이를 단속하면서 키우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든다.


아직도 처음 대문이 그대로 있고, 대문을 붙드는 돌도 그대로다! 남편과 신기해하며 정면으로 오니까 대문이 열려 있었다.

'계신가요'하고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 마당이 보인다!!!!!!!


20201027_134033.jpg 마당을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이 마당을 본 건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다.


IMG_7464.jpg 엄마의 화분이 가득 놓여있던 마당. 집 안에도 화분이 천지였다!


이 사진은 1998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결혼식이 석 달이 채 남지 않았을 때로 남자 친구가 찍어주었다.

저 개는 남자 친구와 함께 입양한 녀석인데 결혼해서 입양하면 어린 강아지를 빈 집에 두고 출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계획적으로 일 년 전에 입양했다. 그래서 한 살 정도가 될 무렵에 결혼했고, 계속 우리와 잘 살다 2010년에 떠났다.

우리도 2011년에 살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이 집터에 저 녀석의 유골을 뿌려주었다.


20201027_134236.jpg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지하실에는 보일러가 있는데 연탄을 넉넉히 쌓아둘 정도로 공간이 넓다. 옆에 빗자루가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면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나오고 광과 장독대가 있다.


보일러는 한동안 연탄보일러였다. 겨울마다 연탄을 들이는 일은 우리 집의 큰 이벤트였다. 트럭 가득 연탄이 도착하고 골목에서 지하실까지 엄마와 아빠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이 늘어서서 연탄을 옮겼다. 잘 쌓는 기술이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늘 연배가 있으신 연탄가게 사장님이 받아서 쌓았다.

한 겨울에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새벽 알람에 맞추어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 나가서 연탄을 갈았다.

나중에는 기름보일러로 바꾸었다. 추운 겨울 자다 일어나 새벽에 연탄을 갈러 나가지 않게 되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난 기름값이었다.


20201027_134226.jpg 현관문은 두꺼운 철문으로 교체되어 있다. 그런데 공사 중이라 집이 텅텅 비어있었다. 여기도 상가로 개조하는 것일까?


20201027_134101.jpg 내부는 공사 중이었다. 덕분에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벽과 천장과 문이 짙은색 나무였던 내부는 밝게 바뀌고 구조도 좀 바뀌어 있었다.


20201027_134037.jpg 추억에 젖은 채로 마당을 두리번거리다가 이것을 발견했다. 담장에 걸려있는 철근 고리를.


이제 가자고 돌아서다가 다시 한번 마당을 쳐다보았는데 철근 고리가 눈에 띄었다.

남편에게 "어머!!! 저것 봐! 저 고리 말이야!!"라고 소리쳤다.

남편도 발견하고 "이게 여태 있다구?"


20201027_134051.jpg 집을 짓자마자 아빠가 철근을 구부려서 걸어놓은 고리다. 이 고리의 용도는 바로 아래 있는 수도에서 연결된 마당 청소용 긴 호스를 둘둘 말아 걸어놓는 용도이다.


그러니까 아빠가 만들어 놓으신 이 고리도 37년째 이 담벼락에 걸려있는 것이다.

우리 이후로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고리의 용도를 잘 알았을까?

누군가는 이 고리가 수도 바로 위에 있는 것을 보고 호스를 거는 고리라고 알아챘을까?

누군가는 이 고리를 보고 '이 철근은 대체 뭐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빼내기 쉽지 않았겠지.


아빠는 뭐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자, 어디~'라는 말과 함께 만들기에 돌입했다. 가전제품도 고장이 나면 일단 아빠가 고치는 과정을 거쳤다.

공구통을 들고 마당에 앉아서 뭔가를 뚝딱뚝딱하셨는데, 그걸 나는 항상 관심 있게 들여다보았다.


그 시절엔 이런저런 학교 준비물들을 알아서 다 챙겨가야 했는데, 색연필이나 색종이야 문방구에서 샀지만, 과학상자라거나, 실험 도구 같은 것은 아빠가 만들어 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문방구에서도 교과 진도에 맞는 준비물들을 죄 팔았지만, 아빠는 자신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준비물은 종이상자, 나무상자 등등 온갖 것을 동원해서 만들어 주셨다.

나만 다르게 생긴 준비물을 가지고 가는 게 별로였던 국민학생이었지만, 그래도 아빠가 만들어 주는 게 싫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어린이였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더 편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싶은 생각이 들면 미루지 않고 실행하는 아빠였다.

살림을 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런 아빠가 엄마 입장에서는 마냥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어쨌든 잡동사니가 늘어나는 거니까. 그래도 집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즉각 실행하는 타입인 건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친정에 가면 아직도 아빠는 나에게 줄 것(주로 음식)의 목록을 빼먹지 않도록 메모지에 적어놓고, 그냥 들고 가도 된다고 해도 박스에 흔들리지 않게 담고, 노끈으로 딱 묶어서 손잡이까지 만들어 주신다. 고작 5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IMG_7448 (1).jpg 이 사진을 보면 벽에 호스가 걸려있다. 저 긴 호스를 고리에 걸어놓았다.


IMG_7465.jpg 이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목욕을 시키는 사진인데, 호스의 일부는 그 고리에 걸려있고 적당한 길이만큼 내려서 사용하면 되었다.


어쨌든 아빠의 그런 모든 것이 녹아있는 단적인 물건인 '철근 고리'를 보자 놀라움과 그리움과 뭔지 모를 감정이 뒤섞였다. 이 집의 구석구석에서 있었던 일과 젊은 부모님과 어린 나와 그 모든 것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집을 둘러보면서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고 있을 때 마주친 아빠의 철근 고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두고 있는 둑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엄마와 아빠도 이걸 보면 나처럼 놀라고 추억에 젖으실 거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전송했다.

"아직도 여태 이게 있더라구!!! 대박이지?"라는 멘트도 보냈다.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반가워하실까, 저것이 아직까지 있다는 걸 무척 신기해하시겠지? 하면서 오르막길을 올라 한강진 역에 다다를 무렵,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저게 아직도 있네. 근데 코로나인데 너 왜 돌아다니니?"

"아, 마스크 잘 썼다고!!! 애가 좋아하는 빵 사러 잠깐 왔다고."

어휴, 노인네가 되더니 찬물 끼얹는데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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