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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Nov 13. 2020

13년 만에 아이가 평균이 되었다.

이른둥이의 고군분투


대표로 쓴 사진은 2010년부터 2017년까지(만 3세부터 10세까지)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의 간판 밑에서 찍어준 아이 사진이다. 지금은 식당이 없어져서 더는 사진을 찍지 못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2007년 7월 9일로 거슬러 간다. 

임신 34주가 막 지났을 때였다. 


임신 24주쯤부터 혈압이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스트레스 요인이 없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안정을 취하면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계속 들었다. 동네에서는 나름 유명한 산부인과였고 의사는 자연분만 쪽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34주가 지난 그날도 오라는 날짜에 맞추어서 남편과 함께 병원에 들렀는데 의사는 검사를 하더니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당장 대학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응급실로 가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투가 너무 평온해서 별일이야 있겠나 생각했다. 


그 길로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 병원에 갔다. 진통도 없는데 왜 응급실로 왔나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각종 검사를 하고 배에는 태동 검사기를 채웠다. 2시간이 지나 의사가 태동 검사표를 보더니 당장 분만을 해야겠다는 날벼락같은 말을 했다. 간호사에게는 우리 병원에 남는 호흡기가 없으니 인공호흡기가 있는 병원을 알아보고 환자를 보내라고 했다.


나는 꿈속에 있는 것처럼 그저 가만히 누워서 그들의 소리를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호흡기 남아있는 병원이 왜 이리 없는 거야.'

'대전까지 보내야 하나?'

간호사들은 여기저기로 전화를 돌리면서 이런 말들을 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일산 동대 병원에 호흡기 있대!"라는 말을 했고 나는 구급차에 실렸다. 


일산의 병원에는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응급실 앞에 마중 나와 있던 의료진들은 내가 응급환자라도 되는 듯 침대 채로 나를 옮겼다. 채혈을 한다, 소변줄을 꼽는다, 혈압을 잰다, 태동검사와 자궁수축 검사를 한다. 온갖 검사가 끝이 없었다.


퇴근하려다 다시 돌아왔다는 교수는 위험한 산모를 이제야 대학병원으로 보낸 동네 의사에 대한 원망을 한차례 쏟아냈다. 그러면서 양수가 거의 없다는 믿기 힘든 말을 하더니 얼른 양수를 주입하고 당장 분만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혈액 응고 반응이 없어서 수술을 못하고 유도분만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7월 10일이 되었고 밤새 각종 검사에 시달린 나에게 아침 7시에 유도분만 약물이 주입되었다. 전날부터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밤도 꼴딱 새운 마당이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자궁에 식염수를 주입하는 양수 주입을 하고 있었는데 식염수의 반은 줄줄 새고 있어서 침대는 이미 흥건했다. 나는 젖은 매트리스에 누워서 내 몸에 달려있는 13개의 장치들이 혹여 빠질까 봐 꼼짝도 못 하는 채로 지옥 같은 진통에 시달렸다. 


멀리서 산모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의사는 내게 힘들면 소리를 질러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통 때문에 숨을 잠깐이라도 멈추면 바로 뱃속 아이의 그래프가 꺾이는 게 모니터에 보였으므로 소리까지는 지를 수도 없었다. 15시간의 자궁 수축에 뱃속 아이는 완전히 지쳐서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꼬박 30시간째 시달린 나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때 혈액 응고 반응이 있다는 소식에 밤 10시에 수술 결정이 났다. 그래도 전신마취는 위험하므로 하반신만 마취하고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고 척추에 관을 심고 마취제를 넣었다. 


어둡고 차가운 수술실에는 내가 언뜻 둘러본 것만 17명이 있었다. 모두 각자 할 일이 있었는데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 두 분이 인큐베이터 옆에서 초초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내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임무를 맡은 의사가 물었다. 

"애기 나오면 얼굴 보여드려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추운 건 처음이었다. 무서워서 떠는 건지 추워서 떠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배에 둔한 감각이 느껴졌는데 의사가 꼬집어 본 거였다. 아프냐고 묻기에 고개를 젓자마자 배에서 더운 액체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고, 곧바로 한 명의 의사가 나를 올라타더니 힘껏 누르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아, 내 갈비뼈가 다 부러지겠구나. 그 부러진 뼈에 아기가 다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아기를 빼내기 위한 고군분투가 이어지고 어렴풋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까 서있던 간호사들의 뛰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7월 10일. 34주 3일 만에 그렇게 아기를 낳았다. 원래 예정일은 8월 18일이었다. 

아기는 몸무게 1.56kg에 키는 44cm라고 했다. 34주 치고도 작았다. 뱃속에서 한 달이나 성장이 멈춰있었다고 했다. 


아기는 너무나 작게 태어났지만 천만 다행히도 자가호흡이 되어 호흡기를 달지 않았다. 34주가 그 기준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아기의 체중이 문제가 아니고 주수가 중요하다고 했다. 34주면 괜찮다고 수술 전부터 나를 안심시켰다.

 

태어난 다음 날에는 1.48kg까지 체중이 줄었다. 모든 아기들은 원래 태어나고 수분이 날아가면서 다음날에는 체중이 줄어든다고 했다.


하루에 15분의 면회 시간에 맞추어서 며칠 후부터는 나도 아기 얼굴을 보러 다녀왔다. 

일주일 후에는 아기를 병원에 두고 나는 퇴원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면회시간에 맞추어서 아이스박스에 유축한 모유를 담아 병원으로 아기를 보러 갔다. 


'김현주 아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아기의 온전한 발


인큐베이터 안으로 손을 넣어 손가락 끝으로 아기의 손을 조심해서 만지는데 아기가 내 새끼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아기의 다섯 손가락은 내 새끼손가락 한마디를 다 감싸 쥐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거기에 투명하고 얇은 손톱이 보란 듯이 붙어있다는 게 신기했고, 관절마다 주름이 져 있는 것이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느다란 다리에 달린 작고 반질한 발은 내 엄지 손가락보다 작았는데 그 작은 발에는 아주 작은 복숭아뼈가 보였다. 

아기의 가느다랗고 빨간 팔과 다리에는 살이라곤 아예 없어서 뼈 위로 큰 피부를 대충 입은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뱃속 대신 인큐베이터


면회시간 15분, 그것도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서 대부분 내가 들어갔다. 스마트폰이 없을 때라서 카메라를 챙겨가서 인큐베이터 너머로 아기 얼굴을 찍어서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태어난 지 열흘. 이제 링거를 맞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매일 다른 자리에 생기던 주사 멍자국도 곧 사라지리라.


태어난 지 12일째. 체온조절이 잘 되어 인큐베이터 밖으로 나온 아기. 내가 아기를 처음 안아본 순간이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창 밖에서 남편이 사진을 찍어두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12일이 지나서야 처음 태어난 날의 몸무게 1.5킬로를 회복했다. 

퇴원 기준은 아기 몸무게 2킬로다. 어서 2킬로가 되어서 집으로 데려올 날이 오기만 바랐다.


병원에서는 기저귀를 갈고 나면 맘마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저귀만 갈면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그래서 이 무렵, 아기새 같은 귀여운 사진이 많다.


생후 20일째. 머리 전체가 내 주먹보다도 작다. 


2007년 8월 6일. 김현주 아기는 2.082kg이 되어 28일 만에 퇴원했다. 


아기를 집으로 데려오니 살 것 같았다. 비록 잠은 못 잤지만 내 아이의 요구를 지체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맘이 편해졌다. 


아기를 가슴팍에 올려놓으면 신기하게 깨지 않고 잘 잤다. 우리는 몇 개월이나 아기를 배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대화를 했다. 아기는 엄빠의 배 위에서 놀고 잤다.


늘 잠이 부족하고 피곤하고 유축을 하고 젖 물리는 연습을 하면서 우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진짜 고난은 이게 아니었다. 

세상은 마르고 작은 아이와 그 엄마에게 만만치 않았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아기는 누가 봐도 깜짝 놀랄 만큼 작고 말랐다. 

병원이고 어디고 어쩌다 아기를 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그 사람들도 단지 이렇게 작은 아기는 처음 본 거였기 때문이다. 나라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을 테지, 생각했다.


타박은 아기의 첫 정기검진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기실에 있던 다른 이른둥이의 엄마였다. 

"젖을 먹인다구요? 애가 빨리 크려면 분유를 먹어야지. 분유도 다른 애들보다 훨씬 많이 먹어야 따라잡죠."

하지만 나는 젖이 잘 나왔기 때문에 15개월까지 젖을 먹였다.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손이 자라는 게 신기하다. 길이 두께 관절 모두 빠짐없이.


내 품의 아기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아이가 걸으면서 본격적인 눈총이 시작되었다. 여름이면 더했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아이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더 쳐다봤고, 숙덕거리는 일도 있었다. 

'헐~ 저 애 봤어? 엄청 말랐어.'

사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2011년. 만 네 살. 뒷모습은 괜찮아 보여도 옆을 보면 다들 종이인형 같다고 했다. 쪼그리고 앉으면 한 줌으로 보였다.


한국 나이 여섯 살. 집에서만 입을 수 있는 민소매 티. 밖에서는 어림도 없다.


특히 어르신들은 아이의 팔을 덥석 덥석 잡았다. 

"아유, 이게 뭐야."

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로 모르는 어른들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내가 옆에 항상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아이를 혼냈다. 


"얘! 밥 좀 먹고 다녀. 이게 뭐니!" 

"너, 밥 안 먹는구나? 밥 안 먹으면 나쁜 애야." 

모르는 아이를 잡고 혼내놓고는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 가는 것이다. 

'애좀 잘 챙겨 먹이지, 쯧쯧...'이라는 말이 생략된 눈빛.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더 심해지는 낯선 이들의 무수한 타박과 참견과 눈총.

나는 '아줌마처럼 살찐 것보단 백번 나아요!' 같은 분노의 말들을 매번 삼켰다. 

미용실을 가도, 식당을 가도, 놀이터를 가도 사람들은 아이에게 한 마디씩 보탰다. 


"밥 좀 먹어라."


나도 어렸을 때는 무지 말랐었다. 우리 때는 살찐 아이는 드물었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마른 걸로 유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친구들이 부러워했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는 나도 이런저런 타박을 들었다. 

"너네 엄마 계모니? 그래서 밥을 안 주니?" 이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다. 


남편은 더 말랐던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이토록 마르지는 않았다.'라고 하셨지만 남편의 건강기록부를 보면 아이의 초등학교 기록보다 남편 체중이 덜 나갔던 게 맞다. 키는 더 컸으니 훨씬 더 말라 보였을 것이 확실하다. 단지 그때는 대체로들 말랐기 때문에 눈에 덜 띄었다. 


시댁에 가면 한 번씩은 "애가 어째 더 마른 것 같다." 하는 얘기를 들었고, 그건 모두 나의 불찰로 여겨졌다. 

"의사가 그러는데 엄마랑 아빠가 어려서 워낙 말랐었기 때문에 애도 살이 안 찔 거랬어요. 그리고 애가 주전부리를 안 해서 그렇지 밥은 잘 먹어요."

사실이 그랬다.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작은 입으로 정말 정말 오래 걸려서 그렇지 제 몫은 먹었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외국에서도 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에서는 겨울 옷을 입었는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아이가 몇 킬로냐고 물었다. 인도에서는 워낙 마른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 속에 위화감 없이 섞일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식당 주인들은 많이 먹어야겠다는 말들을 했다.


초 3학년. 아침에 교문 앞까지 함께 가면 학교 앞에 나와계신 교장 선생님은 할 말이 없어서인지 하루가 멀다고 나에게 "아유, 은찬이가 너무 말랐어요."라는 말을 매번 꼭 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수영을 가르쳤다.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정말 내가 봐도 가관이었다. '어쩜 좋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래시가드라도 입혀서 저 마른 몸을 가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이의 모습이 익숙한 나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체육센터에서 공개수업을 하는 날이면 다른 부모들의 놀라는 눈을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수영을 퍽 잘했다는 거다. 


초등 4학년 때다. 여전히 몹시 말랐지만 그래도 수영을 일 년 넘게 해서 그런지 몸이 제법 다부져진 상태가 된 게 이 정도다.


나는 아이 몸무게에 집착했다. 정말 지독하게 안 늘었다. 몸무게는 일 년에 1킬로밖에 늘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내가 하루에도 늘릴 수 있는 1킬로가 아이에게는 일 년이 걸렸다. 키는 조금씩 자라고 있으니 아이는 엿가락을 늘이는 모양새가 되어 점점 더 말라 보였다.  


먹는다고 먹이는데도 지독하게 안 늘었다. 매일 저녁을 먹으면 몸무게를 쟀다. 그게 하루 중에 가장 많이 나가는 때니까.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몸무게가 늘은 날에는 아이도 박수를 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이스크림을 계속 먹여요. 얼마나 살이 찐다구."

어떤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깃했지만 살찌라고 아이스크림을 계속 퍼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떡이랑 과일을 먹여요. 위를 늘려야 된다구요."

또 어떤 엄마는 이런 팁을 줬다.


한 입이 너무 작고 오래 씹어서 식사시간이 끝나면 진이 빠지는 날들이었다. 다른 애들은 고기를 척척 먹었지만 내 아이는 굉장히 부드러운 부분을 아주 잘게 잘라줘야 했다. 다른 아이들 열 숟가락에 끝나는 식사를 60번은 떠 먹여야 끝났다. 

내가 유일하게 받는 위안은 편식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덮을 정도의 위안은 아니었다.




우리의 소망은 아이의 키와 몸무게가 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표'는 '성장 백분위 표'이다.

성장 백분위 표는 아이의 각종 신체 사이즈와 체중이 개월 수대로 나와있는 숫자로 가득한 표인데 하위 3%부터 97%(상위 3%)까지 수치가 적혀있다. 


내 아이의 키와 몸무게는 언제나 그 표의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3%라도 되면 좋겠어!!!!

내 친구는 왜 표에 집착하냐고 했다. 자기 애는 병원에나 가야 키와 몸무게를 재본다고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거지. 


아이가 여섯 살이 되면서부터 키는 표 안으로 슬슬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하위 3~5%를 줄곧 유지하다가 언제는 10%를 찍은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내내 키 번호가 앞에서 세 번째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체력은 좋아서 여행을 가면 대여섯 시간을 내리 걸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약한 아이'라고 여겨졌다. 그래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력은 많이 부족하긴 했다.

"그래도 지구력은 너를 따라갈 애는 없을걸."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감기도 일 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였지만 말랐다는 이유로 약한 아이로 여겨졌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대단한 일이 생겼다. 5학년 겨울부터 슬슬 체중이 불기 시작했다.

드디어 몸무게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자, 이제 몸무게를 좀 불려볼까?'하고 어디 몸속의 스위치가 켜진 것 같았다.


매일 체중을 재면서 아이도 남편도 나도 신기해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무슨 조화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운동하는데 왜 몸무게가 늘지?


아이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내용이다. 6학년 때 체질량지수가 정상이 되었다.


일 년에 1킬로 겨우 늘어나던 아이가 5학년에서 6학년이 되면서 9킬로가 늘었다.

5월쯤에 측정한 이후로도 몸무게는 계속 늘었다.  

아이의 몸무게도 드디어 표 안으로 진입했다.


아슬아슬하게 표 안으로 진입해 있는 키와 몸무게는 한 번만 까딱해도 표 밖으로 밀려나갈 것처럼 위태로운 숫자였지만 어쨌든 우리의 작은 소망을 이루었다. 

평균값인 50%에 적혀있는 수치를 보면 엄두를 못 낼 숫자들이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만족하자 했다. 


6학년 때 수치를 비교해 보면 남편은 148cm에 31.5kg, 나는 150cm에 31kg으로 적혀있다. 

얼마나 말랐었던 건가. 우리 부모님들은 은찬이보다 더 말랐던 애들을 키우셨던 거다. 


아이는 올해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하필이면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가는 날이 드물었고, 우리는 날마다 산에 올랐다. 

아이는 산에서 쑥과 나물을 뜯는 것에 열광했고, 뜯어온 나물로 음식을 해 먹고 즐겁기만 했다. 

등교를 안 하니 잠도 푹 잤다. 크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한 달에 한 번씩 피아노 옆의 벽에서 키를 잰다. 집에서 재는 것인데도 아이는 최대한 허리와 목을 늘린다. 

체중도 자주 잰다. 예전처럼 매일은 아니지만 며칠에 한 번은 체중을 잰다. 여전히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잰다. 


아이는 급성장기를 맞아 목소리도 조금 변하고, 몇 달 전부터는 키도 한 달에 1센티씩 자라고 있다.

나도 그랬고 남편도 그랬다. 각자의 급 성장기에는 일 년에 12센티가 넘게 자랐다. 


지난달에 아이의 키는 160cm가 되었고 백분위 표의 50%에 도달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의 체중과 키를 한 번씩 기록하는 남편이 지난달에 기록을 하다가 내게 말했다. 


"은찬이 키가 드디어 평균이 되었어!"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평균이었다.

"평균이 되었다고? 우리 뭔가 파티 같은 걸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도 기뻐하면서 엄마와 아빠에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언젠가 아이가 밥을 먹다가 운 적이 있다. 일곱 살 때였다.

식사 때마다 내가 쏟아냈던 험한 말들과 협박과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숱하게 들었던 타박들도 알게 모르게 한이 맺혔을 거다.

그래도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나였다. 


이 일이 있기 며칠 전에 아이는 15킬로가 됐다고 좋아했었다. 

그걸 보고 같이 좋아해 주면 될 것을 한이 맺힌 나는 부아가 치밀어서 좋아하는 아이에게 

"다들 세 살 때 15킬로야. 지금 15킬로 됐다고 좋아할 일 아니야."라고 매몰차게 말했다. 


아이는 좋아하던 얼굴을 싹 거두고 충격받은 얼굴로 

"몰랐어. 나 정말 몰랐었어. 세 살 때 15킬로라는 거 몰랐었어."라고 했다.


상처 받은 영혼이 보이는데도 나는 못난 엄마라서 한번 더 쏘아댔다. 

"여섯 살 때는 다 19킬로나 20킬로거든? 며칠 있다가 유치원에서 체격 검사한다고 했지? 그때 다른 친구들 몇 킬로인지 봐라."


그 날부터 아이가 체격검사 날을 걱정하는 걸 알고 있었다. '나만 15 킬로면 어쩌지.' 몇 번이나 그랬다. 

결국은 걱정에 밥을 먹다가 울음이 터진 거다. 


"선생님이 나 너무 말랐다고 뭐라고 하면 어쩌지. 그래서 입원하라고 하면 어쩌지. 내가 너무 말라서 걱정이 돼." 하고 펑펑 울었다. 


입원은 내가 몇 번 하던 협박 같은 거였다. 이렇게 마르면 결국 입원해서 혈관에 주사 맞고 살아야 한다고. 

조금 더 힘을 내서 먹어줬으면 하는 마음 표현을 협박으로 하다니.


나는 나대로 늘 마음고생을 했었다. 

부모님들의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서러웠다. 자기들은 더 마른 애 키웠으면서! 


의사들도 미웠다. 상담을 하면 잘 좀 먹이라고 했다. 

누군 잘 먹이고 싶지 않습니까? 아이 입에 깔때기를 꼽을까요? 

다른 의사는 매끼 소고기 100그람씩과 매일 우유 500미리를 먹이라고 했다. 

내가 그걸 안 먹이고 싶겠어요? 무슨 수로 매끼 소고기 100그람을 애한테 먹여요. 갈아서 튜브로 주입해요? 


나의 기분은 아이가 잘 먹은 날과 잘 먹지 않은 날로 극명하게 갈렸다. 

몇 년에 한 번 어쩌다 장염이라도 걸리면 반드시 2kg이 빠졌고, 다시 복구시켜야 할 체중은 나를 짓눌렀다.

모든 음식은 아이 위주였다. 아이가 잘 먹는 걸 만들고 맛있게 먹은 걸 사 먹었다. 나의 욕구는 점점 채워지기 힘들었다. 


나는 밤마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만들어 먹었다.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아이는 저토록 말랐는데 나는 점점 살찌는 엄마가 되어갔다. 


그런 숱한 날들이 있었다. 

마르고 작은 아이의 신체는 모두 나의 탓이라는 세상에서 외로웠던 날들이. 


이번 달 아이는 161cm가 되었다. 매달 1cm씩 자라고 있으니 아직 9개월은 나보다 작을 것이다. 


체중은 여전히 하위 10%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체중이 딱 좋다고 느껴지고, 계속 이 정도를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아이에게 아무도 말랐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날씬해서 부럽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아직도 아이의 몸을 만지면 굉장히 신기하다. 

내 아이의 몸에서 살이 느껴지는 게 너무나 낯설고 이제는 딱딱하지 않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매번 감탄한다.

"와, 어떻게 살이 붙었지? 팔뚝 좀 만져 봐. 말랑한 느낌이 난다니까?"

팔뚝을 주무르며 감탄하는 엄마와 아빠를 아이는 계속 견뎌준다. 


남편과 나는 식사를 하다가 이제는 고기를 척척 씹어 먹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슬쩍 웃고 다시 밥을 먹는다. 아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감탄을 쏟아내면서 먹는다. 

이제는 한 숟갈이 보통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급식은 다른 급우들보다 조금 늦게 먹는 편이라고 한다. 

"다들 식신이라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먹는지 몰라."

나는 그저 급식 시간 안에 다 먹는 게 대견하다 생각한다. 

"오늘은 진짜 맛있는 게 나와서 두 번이나 더 받았다니까!"

아이구, 장한 내 새끼.. 속으로 그런다.




"자랄 때가 되면 자라더라."


엄마는 내게 이 말씀을 몇 번 하셨다. 

엄마는 은찬이와 6년 터울이 있는 언니의 아들을 초등 내내 키워주셨는데, 작고 말랐다며 항상 걱정을 달고 살으셨다. 어떻게든 더 먹이려고 애쓰셨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 몸이 탄탄해지고 부쩍부쩍 자라면서 살이 붙는 걸 직접 보셨다. 그래서 저런 말씀을 내게 하셨던 거다. 


나도 그것을 보았지만 그때는 그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내 눈 앞에 있는 건 작고 미치도록 마른 아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자랄 무렵이 되어야 자란다는 걸. 


지금 너무 애쓰고 눈물을 흘리며 고민하는 외로운 엄마들에게 이 글도 위로가 되지는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짐을 조금 내려놓길 바라면서 썼다.

시간이 약이고 때가 되면 자라더라고. 그러니 너무 애쓰고 힘들지 마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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