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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Nov 25. 2020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시간

잔인한 코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도 벌써 10개월째 

올 1월 말부터 슬슬 시작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2월에 있었던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은 학부모 참석 불가가 되었다. 

졸업생이 80명도 안 되는데 아이당 한 명이라도 참석하게 해 주지. 안타까운 마음에 과잉반응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때는 아직 다들 마스크를 끼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도 중학교 예비 소집은 원래 날짜에 이루어졌고, 교과서도 받아오고 교복도 맞추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바가 있어서 교복업체가 만류할 정도로 큰 옷으로 장만했다. (얼마나 잘한 것인지!!)


처음으로 튤립 절화도 사봤다.


집에 식물이 꽤 많지만, 그래도 화사한 튤립이 주는 기쁨은 폭발적이다.


졸업식과 입학식 취소로 화훼농가가 무척 힘들다는 얘기에 두 번에 걸쳐 튤립을 주문했는데, 그 덕분에 초봄 내내 집이 화사했다. 

꽃이 주는 위로와 기쁨이 분명히 있다. 그것도 폭발적인 화사함이 있다. 

이미 각종 식물로 그득한 거실은 찬란하지만, 꽃은 다른 영역의 기쁨이다. 


꽃의 화사함이 무색하게 코로나 사태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아이의 중학교 입학은 몇 번에 걸쳐서 계속 미루어졌다. 

아침잠이 많아서 등교시킬 걱정이 컸던 나는 늦잠을 잘 수 있다며 아이와 킬킬거리면서 좋아했다. 등교가 이렇게까지 미뤄질 줄은 모르고. (6월 8일에야 처음으로 등교했는데 그마저도 금방 멈추었다.)



본격 온라인 시대

4월 16일이 되어서야 온라인으로 입학식을 하고 본격적인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들의 얼굴도 모른 채로 내내 수업을 받았다. 초등학교와 상당히 다른 중학교 수업의 이모저모를 온라인으로 맞닥뜨렸다. 

온라인 플랫폼에 선생님 학부모 학생 모두가 적응을 해야 했는데, 내 생각에는 그래도 다들 빠르게 적응했다. 과연 인터넷 강국답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려움을 겪었던 선생님과 가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모두가 해내었고 그 과정에서 선생님들의 노고가 눈에 보였다. 

요즘에는 학급당 인원이 적어서 (아이의 반 인원은 18명이다. 서울에서 꽤 적은 편인 곳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급 인원이 40명이라도 되면 선생님들은 뼈가 다 갈릴 지경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춰놓고 수선해놓은 교복은 한 번도 입지 못했는데 하복 구매 안내가 나왔다. (6월 첫 등교에 하복을 입었다.)

업체에 가서 하복 구매를 하고 다시 집콕의 시간을 보냈다. 


입학 전에 구매했던 이 교복은 10월이 되어서야 입었고, 같은 날 사서 기장을 줄여놨던 체육복은 다시 10월에 원상복구를 시켰다.


온라인 수업도 열심히 하고 집에서도 (나름) 꾸준하게 공부를 했다.


저녁식사 후 과자를 먹으면서 갖는 독서 타임은 너무 행복해.


우리는 마치 온라인 수업이 있을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처박아둔 중고 컴퓨터를 꺼내와 방에 놓아주었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어쩌면 인강을 들을 수도 있으니까, 하고 설치한 참이었다. 그랬더니 이렇게나 내내 온라인 수업을 하는 거다. 


스마트폰도 그렇다. 남편과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사줄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꽤 했는데 안 사줬으면 어쩔 뻔했냐고 그랬다. 고민 끝에 2월에 장만해준 스마트폰이 너무 요긴하기 때문이다. 단톡 방에 각종 공지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모둠활동도 꽤 많은데 카톡으로 이야기가 오고 간다. 수업 때 앱을 활용하는 경우도 벌써 몇 가지나 된다.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다.

1학기 때는 화상 수업 때마다 내 노트북을 빌려 주었는데, 광복절 즈음하여 다시 2차 유행이 시작되었다. 희망을 버리고 웹캠을 사서 아이 컴퓨터에 달아주었다.


아이도 우리도 처음 접하는 구글 클래스룸. 초반에 아이는 뻔질나게 나를 불렀다. 

"엄마, 이거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난들 알겠니? 하면서 낯선 화면을 들여다본다. 컴퓨터 사용자 경험이란 건 너무 소중한 경험치라 처음 접하는 것도 대부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도 그걸 고스란히 들여다보면서 경험치를 쌓아 나갔다. 

구글 미트, 잼 보드, 패들렛, 구글 문서 공유 등등.... 온라인에 최적화되어간다. 지금은 뭐 알아서 척척이다. 

선생님들도 그러셨을 테지. 모두가 이렇게 또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거다.




자영업자에게 코로나19

코로나에 타격을 입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자영업자에게는 보다 직격탄이었다.

우리 역시 자영업자라 코로나19로 꽤 타격을 받았다. 

남편은 무역일을 하는데 거래처들은 거의 중국 업체다. 여기는 아직 심각하지 않았을 때부터 중국은 심상찮았다. 


거래하는 중국 업체에서 속속 메일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모든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는 내용으로 더 큰 문제는 이게 언제 다시 가동될지 자기들도 알 수 없다는 낙담에 가까운 통보였다. 

시작점이 되는 곳에서 나자빠지니까 중간에 낀 우리도, 우리 다음의 업체도 도미노처럼 줄줄이 스톱이 되는 상황이었다. 

당분간 사무실 임대료만 속절없이 나가게 생겼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직까지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지만 우리 정도면 그래도 괜찮다고 여겨야 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장 허덕일 곳들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임금을 줘야 하는 직원은 없으니까.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도 받았다. 특히 자영업자에게 주는 보조금은 서울시와 중앙정부 할 것 없이 빠짐없이 받았다. 전부 합치면 5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코로나 이후의 사업 실적이 말 그대로 무無가 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관계자는 깜짝 놀라면서 걱정을 할 정도였는데, 그런 와중에 보조금이 큰 도움이 됐다. 

꽤 아껴서 생활하는 편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세 식구의 휴대폰 요금도 2만 원이 안 된다.)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하다못해 출근이나 등교하는 인원이 없기 때문에 여름까지는 마스크 값도 퍽 아꼈으니까. 


중국은 얼마 전부터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슬슬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해야 할 텐데...



좁은 집에서 셋이서 옹기종기

다행인 것은 셋이 죽이 잘 맞아서 별 탈이 없다는 것이다. 

셋이 재미있게 할 것은 차고 넘쳤다.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얘기를 하고, 게임에 열광하고 운동을 했다. 

아이와 남편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걸 먹어도 감탄을 쏟아놓는 사람들이라서 마음만은 풍요 그 자체였다. 

아이가 등교를 하지 않으니까 자잘한 걱정거리도 없어서 마음이 편했다.


아이가 종일 집에 있어도, 남편이 종일 집에 있어도 나는 오히려 좋다는 축이었다.


아이의 온라인 수업도 단축수업을 하는 바람에 일찍 끝났다. 

과제도 잽싸게 수업 시간에 맞추어 거의 다 해냈기 때문에 오후 시간이 통으로 남았다. 

아이가 유일하게 다니는 집 바로 앞의 영어 교습소도 확진자 수에 따라 다니다 말다 그랬다. 

신천지 사태를 기점으로는 한동안 쉬었기 때문에 시간이 더 남았다.

하루 세끼와 간식까지 해 먹는 일은 꽤 시간이 드는 일과였지만, 그래도 시간이 넉넉했다. 


sns에서 괜찮아 보이는 건 따라서 해먹기도 했다. 이를 테면 에어프라이에 구워 먹는 홈런볼 같은 거. (대유행이었던 달고나 커피는 안 했다.ㅎㅎ) 


거의 10년 만에 베이킹도 했다. 


5월에는 마늘장아찌를 담그고, 6월에는 매실장아찌를 담갔다.


 우리에게는 옥상이 숨통이었다. 좁은 실내에서도 답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옥상 덕분이었다. 옥상은 우리가 맘껏 숨 쉴 수 있는 안전한 바깥이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선물

고통스러운 코로나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물이라고 말하는 건 '산山' 때문이다.

대단한 산 얘기가 아니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던 뒷산의 발견이라고 할까.


어느날 답답한 마음에 집 뒷산에 가보았다. 

우리가 정말 가끔씩 지름길 용도로만 이용하는 산으로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산이다. 산의 초입에 있는 운동기구 정도만 노인들이 이용하곤 한다. 

3월 2일에 있을 중학교 입학식이 미뤄지냐 마냐, 그러는 와중이었다.


산 정상을 찍고 맨손체조를 하고 오는데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최적의 코스


갈 데도 없는데 뒷산이나 가볼까, 하고 올라본 산은 우리 집에서 운동을 다녀오기에 최적의 코스였다. 게다가 사람이 없어서 산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거다.

등교는 계속 미뤄지고, 중국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우리는 넋 놓고 있지 않고 사람이 없는 뒷산에 매일 올랐다. 

"왜 여태 이 산을 안 다녔지?" 


2월 말부터 6월까지 우리 셋은 매일 산을 오르면서 산의 변화를 고스란히 목도했는데 정말이지 대단했다. 

산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매일 조금씩 변했다.

매일 가도 눈여겨보니까 그 변화가 눈에 보였다.


온통 갈색이던 산은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연두색을 조금씩 더해갔다.


자고 일어나면 자라 있다는 말처럼, 산의 식물들은 최선을 다해 깨어났다. 


매일매일 산에 가니까 나무가 구분이 되었고, 더 눈이 가는 나무도 생겼다. 

또 어느 나무에서 딱따구리가 구멍을 파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딱따구리는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었다. 

언제 가도 딱따구리는 항상 그 자리에서 열심히 구멍을 파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조용해서 이상하다 하고 올려다보니까 완벽에 가까운 동그라미의 구멍이 보였다. 일을 끝낸 거였다. 딱따구리는 동그라미 구멍 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산에는 벚나무도 많았다. 꽃이 피어서야 벚나무인 줄 알았다. 올해는 꽃구경 못하겠다 했는데 웬걸, 매일이 꽃잔치였다.


여기에 이렇게 많은 벚나무가 있다니. 벚꽃뿐 아니라 매화나무도 꽤 많아서 매화꽃 향기가 대단했다! 


여기서 20년이 넘게 살면서 이 산에 30미터는 되는 일본목련 군락지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고, 발에 치이도록 산딸기나무가 그득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쑥을 뜯었다. 봄이 되자 쑥이 마구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쑥을 찾아서 뜯는 것에 열광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건 없다고 했다.


쑥이 나올 무렵, 우리는 산에 갈 때마다 가득 쑥을 뜯어왔고, 이걸로 다양한 음식을 해 먹었다. 


4월은 쑥의 날들이라 불릴 정도로 쑥 뜯기에 열광했다. 

아이는 여기도 쑥 저기도 쑥이라고 하면서 쑥만 보면 환장을 했다. 작게 올라온 쑥은 너무나도 어여뻤고, 그걸 찾아서 뜯는 것에 열중해서 4월의 산행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우리가 뜯어온 쑥으로 해 먹은 음식은 너무 많아서 따로 모아서 글을 써도 될 지경이다. 

 

초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산은 금세 정글로 변했다. 서울의 주택지에도 이런 야산이 있다.


차츰차츰 연두색을 내놓던 산은 며칠 만에 우아아악~ 하면서 온통 초록이 된 것이다.


식물은 위대해!!!! 


매화꽃 향기를 뿜어내던 매화나무에 매실이 열렸다. 매일매일 매실이 얼마나 자라 있나 보는 낙이 추가되었다. 


6월이 지나 풀이 너무 많이 자라고 모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산행을 멈추어야 했다.


그 산 밑에서 여름내 캐치볼과 배드민턴을 하며 보냈다. 산에서 실려오는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던지.


산의 생체리듬은 무지 빨라서 지금은 저 모든 초록이 갈색과 노랑과 빨강이 되어서 모두 바닥에 내려앉았다. 며칠 전 우리 셋은 그토록 무성했던 초록이 성긴 갈색이 된 산을 다시 올랐다.

엄청난 에너지다! 식물은 정말 대단해! 이런 말들을 하면서.

 

코로나로 멈춘 시간이 아니었다면 산이 보여준 경이로운 탈바꿈을 이토록 자세하게 알 수 없었을지 모른다. 


2020년은 절대 잊히지 않을 기이한 해가 되었지만, 그 기이함의 한 구석에는 찬란했던 산의 모습과 그 산을 누비는 우리의 웃음 또한 있다. 


아이는 2020년을 '쑥'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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