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느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주 Dec 16. 2020

육아, 그 처절한 외로움에 대하여

누군가가 나를, 나의 고충을 알아준다면...

어제 윤이형 작가님의 '대니'를 읽었다.


'대니'는 윤이형 작가가 2019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면서(대상 수상작'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도 정말 정말 좋다.) 자선 대표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69세의 할머니가 자기 딸의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이다. 손주 육아를 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뻔하다. 늙어서 몸도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까지 돌보면서 자식(딸, 며느리, 사위, 아들)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는 것 아니겠나.

소설 '대니'의 경우는 다르다.


딸은 엄마가 김치 10킬로를 들고 왔다는 말을 듣고, 자기 아이를 키워달라고 한다.


'십 킬로를 쓰러지지 않고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거야? 그럼 엄마, 우리 민우 봐줄 수 있겠네. 내가 복직을 해야 빚을 갚지. 이대로는 도저히 숨도 못 쉬겠고 정말 죽을 것 같아.'라고 한다.


69세인 '나'는 노인복지관에서 마련해준, 소중한 도서관 일자리(벌이는 신통치 않아도)가 있었고, 시장을 구경하거나 원할 때면 산이나 강가로 산책할 자유가 있는 노년이었다. 하지만 성치 못한 무릎은 딸의 요청을 거절할 핑계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손주가 6개월 때부터 키워주기 시작했는데, 낮에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주말에만 아이를 데려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노인이 밤에도 잠을 잘 못 자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는 할머니는 손주가 14개월이 되었을 때 놀이터에서 인공지능 베이비시터 '대니'를 마주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일상과 변화하는 마음에 대해 써놓은 이야기이다.


인공지능 시터 대니만이 할머니의 힘든 것을 알아주고, 걱정해주고, 도와준다. 그 모든 것이 낯설지만 점점 의지하게 되는 할머니의 마음에 대해서.





나는 기계가 아니다.
.........
몸이란 건 웃기고 요망한 덩어리라 음식물처럼 혼자만의 시간도 주기적으로 넣어줘야 제대로 일을 하겠다고 우아를 떨어댔다. 평소에는 내가 그저 기름 약간, 거죽 약간을 발라놓은 뼈 무더기 같다가도, 조용한 방에 앉아 컵에 따른 소주를 천천히 목으로 넘기고 있으면 그나마 사람이라는 더 높은 존재로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가끔 검푸른 한강 물 생각이 났다. 천사 같은 손주 키우기가 유일한 소일거리이자 낙인 늙은이, 그게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아무도 내가 울만큼 힘들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이 혼자 키우기는 젊은 시절 이미 한 번 넘어본 산이었다.
..............
이런 것을 생존이나 생활이 아니라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나는 일종의 숟가락 같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휘청이는 몸에 위태롭게 아이를 얹고 낮에서 밤으로,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끝없이 옮겨놓을 뿐이었다.



할머니가 말하는 게 어떤 것인지 육아를 해본 사람은 너무 알 것이다.

'조용한 방에 앉아서 천천히 소주를 넘기고 있으면 그나마 사람이라는 존재로 회복되는 느낌'이라는 게 뭔지 안다.


아이가 잠이 들면 나도 얼른 따라 잠에 들어 체력 보충을 해야 한다는 걸, 정신과 육체를 어서 쉬게 해 주어야 마땅하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른 척하고 피곤한 눈을 꾹 누른 후에 냉장고를 열었다. 무언가를 만들어서 혼자서 방해받지 않는 식사를 굳이 그 늦은 밤에 꾸역꾸역 하는 이유를 그때의 나도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온전한 내 몫의 음식 한 그릇을 방해 없는 조용한 상태로 천천히 먹고 싶었을 뿐이다.


야식을 먹고 자면 몸이 더 피곤할 것을 알았다. 살이 더 찔 것도 알았고, 그래서 더 자존감이 떨어질 것도, 이 모든 게 건강을 갉아먹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루 중 유일하게 음식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을 수 있는 그 한 번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로 회복하는 느낌이었겠구나, 이제야 끄덕인다.


소설 대니에 나오는 손주는 쉬운 아이가 아니었다.


'쉬지 않고 돌고래처럼 악을 썼고, 원하는 게 있으면 손에 들어올 때까지 발을 구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며 울었다.' 고 쓰여있다.


그런 걸 전혀 하지 않았던 내 아이를 키울 때도 힘들었는데, 노인의 고충이 어떠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한다는 말도 못 하겠다.




육아는 남이 짐작해줄 수 없는 영역이다. 같은 아이, 같은 집, 같은 경제상태, 같은 체력이라도 나의 상태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 참을 수 없는 지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나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소설 속 할머니처럼 나의 엄마도 내 조카를 태어나서부터 초3 때까지 도맡아 키워주셨다. 어려서는 주말에만 데려가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었다.


조카와 내 아이의 터울이 꽤 있기 때문에(6년) 그때는 엄마가 얼마나 힘드실지에 대해 나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고, 아프다 소리가 급격하게 늘어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게 얼마나 처절한 희생이었는지는 내가 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조금 알게 되었다. (그것도 짐작만 하는 수준이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채로, 매일매일 같은 일상(그것도 일방적인 것들이 강요되는)을 보내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인간을 지치게 만든다. 모성애나 부성애로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애 몇 씩 낳고 엄마 혼자 다 잘 키웠어. 그때 세탁기가 있어, 일회용 기저귀가 있어? 그 집안일 다 하면서도 다들 잘만 키웠는데 요즘 사람들은 집안일은 기계가 다 해주는데 왜 그리 엄살인지...'라는 말을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육아를 할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라떼'다. 옛날은 옛날이고, 요즘은 요즘인데 그놈의 천 기저귀 손빨래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윤이형 작가님의 대상 수상작인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에도 육아에 대한 내용이 있다.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다. 앞서 간 여행자들의 데이터는 제대로 전송되어 오는 법이 없으며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지구에서와 다르게 흐른다. 지구에 남겨두고 가는 것은 살아서 다시 보기 힘들 수 있으니 필요한 견본들은 모두 꼼꼼히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기억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희은과 정민은 사랑이라는 스케치북에 연필로 서툴게 우주선의 모양을 그려 넣은 다음 거기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필요한 것은 우주 공간에서 어떻게든(대체 어떻게?) 조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며, 질량 체크를 건너뛰었고, 최소한의 물건을 싣고 남은 공간은 낭만에서 나온 낙관과 감동, 자부심 같은 기체들로 채워 넣었다.

고립되고 폐쇄된 우주선이라는 공간에서 한계가 찾아올 때까지 공동생활을 해야 하므로 비행사들은 인성 검사를 거쳐야 하며 개인으로서의 인내심뿐 아니라 다른 승무원들과의 단체생활에서 협력과 업무 분담과 배려를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도 꼼꼼히 체크받아야 한다. 그러나 희은과 정민은 신뢰라는 이름하에 엄격해야 하는 대인관계와 위기 대처 시뮬레이션 과정을 모두 생략했다.



햐, 얼마나 대단한 비유인지! 그러면서 다음의 글로 이어진다.


'왜 국가는, 부모의 세계라는 우주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니 모두 함께 가자는, 승무원이 되면 혜택을 주겠다는 모객 광고를 조잡한 팸플릿에 인쇄해 수없이 뿌려대면서 그 우주가 어떤 곳인지, 승무원 생활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일까'


육아라는 것에 '희생'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희생 :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희생의 사전적 의미가 저러하니, 내 아이나 손주를 키움에 있어서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진다.


아이의 양육자에게 너그럽지 못한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심지어 '아이가 없는 삶의 행복'에 대해 내가 말을 해도 되는지 걱정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가 있으니까.

나는 결혼하고도 아이가 없는 삶을 꽤 오래 지속해왔기 때문에(8년) 그 두 가지의 삶에 대해서 그래도 좀 아는 편이라 말할 것들이 많은 데도 그렇다.


그런 내가 아이가 없는 삶의 간단함과 자유에 대해 떠들거나, 다시 태어나면 혼자 살아볼 테야, 따위의 말을 하면 금기를 건드린 것 같은 눈총을 받는다.

내 친구도 직장에서 그런 식의 말을 했다가 굉장한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누가 내 아이 사랑하지 않는댔냐고."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건 육아가 가장 대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전에 미국 드라마 SATC(섹스 앤 더 시티)에서도 아이를 낳은 미란다가 아이 다루는 것을 배울 때 전문가가 이런 얘기를 한다. (생각나는 대로만 쓴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있어요?"

"그럼요. 혈육 같은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도 아이가 있어요?"

"아니요. 아이는 없지만 정말 저를 모든 면에서 도와주고...."

(헛웃음)"아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몰라요."


같은 육아를 하더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서 이해의 폭이 상당히 다르다.


내가 아무리 같은 개월 수의 육아를 하는 사람에게 나의 처지를 말한들 (예를 들면 여덟 시간 동안 젖을 물린 채-젖을 물고 자면 정말 잘 잤다.- 내리 컴퓨터 앞에서 일했던 날들, 아기띠를 하고 남편과 새벽 3시 도매시장을 누빈 일 같은 것) 그게 어떤 것인지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혼자 남아 아이를 돌보는 여자의 심정을 모른다.


몇 년의 독박 육아라는 걸 나도 경험해보지 않아서, 굳이 혼자서 힘들게 유모차를 끌고 쇼핑몰에 나가는 엄마들의 심정을 나는 모른다.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 부모의 심정을 나는 모른다.


아무리 손주라지만,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닌 자식의 자식을 키우는 노고와 심정에 대해서도 모른다.

늙은 몸으로 밤잠을 설쳐가면서 손주를 키우는 노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남자 혼자 육아를 하는 심정도 모른다.

아기띠를 하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있는 남성이 받아 낼 시선에 대해서 모른다.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테니,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부부의 심정도 모른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부부가 겪는 고충도 모른다.

(사실 이건 조금은 안다.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동안 부모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무수한 질타와 충고, 참견을 받았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 외롭다.

기쁜 일이라도 외로울 판인데 이건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의 연속이라 더 사무치게 외롭다.




주인공 할머니를 굉장히 힘들게 하는 손주 민우는 대니의 품에서 4초 만에 방싯방싯 웃음을 짓고 더없이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대니의 품에 안긴 채 잠들어, 눕힐 때도 깨지 않고(부모들이 가장 조심하는 지점이다. 눕힐 때 깨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니까.), 다음 날 아침까지 통잠을 잤다고 쓰여있다.


떼쓰는 건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불안정한 부분이 조금씩 있는데 아이들은 자기를 돌보는 사람에게서 그걸 놀랍도록 예민하게 감지해요.



스물네 살로 설정되어 있는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 대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양육자는 불안정한 부분이 없어야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 자체가 갖는 무게를 상상해보라.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은 크건 작건 그것을 표출할 수밖에 없고, 그것 때문에 양육자는 더 불안정한 정신상태가 된다.



아이가 아무리 힘들게 해도 저는 고통스럽지 않아요. 화가 나지도, 짜증을 느끼지도, 지치지도, 침울해지지도 않죠.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저에게는 감정적 불안정이 없거든요.



대니의 품에서 아이가 금세 안정을 찾고 잠이 들고 통잠을 잘 수 있게 된 이유는 대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아이를 쫓아다니면 체력이 달리고, 잠을 못 자면 예민해지니까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고 지치고 짜증이 나고 침울해진다. 뒤이어 찾아오는 죄책감은 필수고.


이것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는, 아니 지켜보는 것으로는 안 된다.

고스란히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엄마들끼리 수다를 떠는 거다.

각자 사정은 달라도 내 심정을 조금은 알아주니까. 고개를 끄덕여주니까.


'아줌마들끼리 만나서 왜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하면서 커피값을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남편이나 부모 이기라도 하다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옆에서 내내 함께하는 남편이 있어도 나는 때때로 지독하게 외로웠다.


돈 버는 게 너무나 힘들다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돈 버는 것보다 육아가 300배쯤은 더 힘들다는 걸 알라. 그걸 알아만 줘도 부인이 힘이 날 거다.'라고 말하는 남편이 옆에 있어도 나는 때때로 육아의 늪에서 홀로 고독했다.


나만 아는 육아의 무게가 있고, 그것은 오직 나만 아는 세상이다.

이토록 사랑하는 아이가 내 옆에 함께 하고 있는 데도 외롭다는 게 아이러니다.




할머니를 멀리서 처음 봤을 때, 친구를 만난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와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표정도 그랬고, 몸을 움직이는 모습도요. 쉬지 않았어요. 저처럼요. 아기를 돌보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어요. 저와는 달랐어요.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할머니를 처음 본 날의 느낌을 대니가 기술한 부분이다.


밖에서는 행복한 모습, 괜찮은 모습이어도 누군가는 외로움 속에서 견디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일 지라도 짐작할 수 없다는 것.

모른다고 없는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어도, 잘 몰라도 그 외로움을 덜어줄 수는 있다.

말할 기회를 주고 그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덜어진다는 걸, 공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덜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대니'의 마지막 세 문장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