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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아 Nov 28. 2022

회복기

허은실 시집을 읽고

올해 거의 많은 시간을 동네의 작은 헬스장에서 보냈다. 돌보지 않고 있던 몸과 마음을 드디어 살피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이  계기가 되어주었다. 웨딩플래너를 고용하고 상견례를 치르고 PT 끊었다. 시작됐구나. 하루하루 거대한 배를 밀어내는 미물이  심정으로 건너갔다 돌아왔다. 짐에게서 짐에게로. PT선생님은 어렵고도 단순한 문제를 냈다. 일주일에 500그램의 지방을 내보내려면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증명하라. 주어진 7개월 동안 열심히 문제풀이를 했다. 주식을 샐러드로 바꾸고, 몸에 좋은 단백질을 섭취하고, 3 헬스장에서 '쇠질' 하며, 밤마다   시골길을  시간 왕복했다. 결과는 12킬로그램 감량. 몇 년 간 불어난 몸무게가 예전으로 돌아왔다. 목표에 닿지 못해 아쉽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표였다. 어떤 행운이나 불운도 끼어들  없는 정직한 땀의 결과. 중요한  줄어든 몸무게만큼 마음에 공터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축축했던 몸이 가을볕과 바람에 기분 좋게 말라가는 기분. 온몸에 가라앉은  찌꺼기가 회오리치며 토출구로 빠져나가는 느낌.  몸은 환기되고 있었다.


때늦은 코로나에 걸려 앓아 누웠다가 바쁘게 다가온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남해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주 토요일에 책방에 출근했을 땐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어 긴 숨을 내쉬었다. 큰 변화는 없었지만 겪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미지 영역의 문제를 일순 풀어버린 느낌이었다. 시원하기도 하고 허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난이도의 시험지가 주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두렵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계속 운동하는 삶을 놓지 않는다면 어떤 어려운 순간도 땀처럼 날려 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와 인스타그램을 켰다. 10월 29일 밤, 친구가 DM으로 보내온 영상을 켰다.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가 자주 걷던 눈에 선한 이태원 골목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흘 내내 수많은 영상을 찾아보면서 그 거리를 거닐며 환하게 웃는 친구와 내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괴로웠다. 하루 행복하게 놀고 잠시 해방된 시간을 누리고 싶었을 뿐인데 도대체 우리가 왜.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한강 <흰> 중에서


뉴스에는 회피하는 책임자의 말이 유령처럼 떠다니고 종이신문엔 매일같이 그들의 얼굴이 1면에 실려 배달되었다. 국회에 출석한 어느 지자체장은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면서도, 이 책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마음의 책임”이라 답변하고 있었다. 아직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멀리 물러서 있는 모습에 참담해졌다. 책을 찾았다. 그날 책방 SNS에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저서 <책임과 판단> 서평을 올렸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멈출 때 평범한 개인도 악이 될 수 있다." 그가 평생 연구해온 '악의 평범성'은 이 책에서도 주요했다.


11월엔 두꺼운 우울 이불을 덮고 불안한 얼굴로 꿈을 꿨다. 아직 10월 달력을 넘기지 못한 채였다. 명확한 이유가 모여 불분명한 무늬를 띄는 아침. 시집을 펼쳤다. 허은실 시인의『회복기』였다. 시집 속 첫 시를 읽으며 이 구절에 머물렀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 책임이 있어요”

「반려」중에서


제목이 곧 시였던 시에 밑줄 그으며.

“타인의 고통은 먼바다의 풍랑주의보가 아니다 –mute”


그 속엔 이런 구절이 있다.

“없었던 일이 / 없었던 일처럼 일어난다”

시 속에 잠언이 있고 그 속에 얼굴이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목소리로.


“슬픔은 가장 거친 옷을 입는다

...

먼 곳에서 오는 / 울고 난 목소리가 부르는 노래 / 너를 통과한다

...

후회를 모르는 얼굴로 이해 없이 사랑하고 싶어서

...

빈 들에 / 산 것들의 / 수의가 덮인다”


「회복기2」 중에서


마지막 구절을 눈에서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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