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대 교사들이 힘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들어, 교육자로서의 길을 이어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근래에 많이 보도되는 교사들의 자살, 교실에서 마주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이런 것들이 정말 영향을 많이 주는 것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본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단순히 적은 월급, 악성 민원 등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교사들은 사회적 대우와 복지만 보고 교사가 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임용고시를 합격 또는 공부했다면, 그 과정에서 이상적인 교실의 모습, 학생의 모습, 교육의 모습들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들이 그린 이상과는 너무 다르다.
내 생각에는, 처음에 말한 최근의 교권 이슈들은 교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교육적 허무주의, 그것이 교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의 원인이다. 그리고 작금의 사태들은 단지 교사들의 교육적 허무주의에 불을 붙인 부채질이자 장작일 뿐이다.
허무주의, 니힐리즘은 삶의 끝은 어차피 죽음이기에 인간의 모든 것이 결국은 의미 없다는 사상적 견해이다. 쉽게 말해 어차피 죽을 목숨 왜 사는가 하는 심각하고 근원적인 물음이다. 허무주의는 늪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허무주의에 사로잡히면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최상의 것은 그대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네. 태어나지 않는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그러나 차선의 것은 - 바로 죽는 것이네."
<비극의 탄생> 41p
허무주의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특히 현실에 사는 인간들이 일터에서 겪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허무주의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생계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에 덧없음을 느낀다면, 우리는 어느새 직업과 일을 넘어 존재의 허무주의를 느끼기에 마련이다.
위에서 말한 허무주의에서 특별히 교육적 허무주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교사의 교육적 허무주의란 교사 스스로 학교에서 하는 일체의 교육적 행위가 의미 없음을 느끼는 상태이다.
물론 교사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들도 직장 내에서 회의감을 느끼고 퇴사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내 생각에 (진실한) 교육자들은 일반 직장인들 보다 본인의 일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 쉽다. 그 이유에 대해 사회적 측면과 교육의 특성으로 나눠 생각해 보자.
먼저 교원의 애매한 지위가 교육적 허무주의를 만든다. 교사, 교원의 본질은 연구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도의 대우가 교사의 위치를 잘 표현한다. 교수법과 교육 내용에 대한 연구보다는 갖가지 행정 잡무와 학생 생활 지도( 그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들에 대한,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할)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물론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행정업무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정작 교사의 승진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은 수업이나 연구보다는 "어떤 행정업무를 해왔는가"에 따라 나뉘는 촌극이 벌어진다. 현재의 교육 현실이 얼마나 주객전도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다음으로 교사의 사회적 측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금전적인 측면이다.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적절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담임과 부장교사는 그 업무량에 비해 보상이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부장교사라는 것도 행정 업무와 책임을 더 많이 부담한다는 점에서 그 보상이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인식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교사의 사회적 인식과 지위는 낮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전 세대에는 급여가 낮더라도 '교사'라는 직업과 지위를 선망하며 교사가 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일어난 급격한 교권 추락과 여론은 교사의 사회적 지위마저 박탈해버렸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회적 원인들이 교사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
다음은 교육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다. 교육은 백 년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다른 업무에 비해 교육은 비가시적이고 장기적인 특성을 가진다. 교육의 비가시적이고 장기적인 특징은 교사로 하여금 교육적 허무주의를 느끼게 하는 원인이다.
교육은 전인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둔다. 전인적인 교육을 위해선 정답이 없는 문제에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교사를 힘들게 만든다. '어떤 인간이 이상적인 인간인가, 어떤 내용이 아이들과 사회와 인류를 위해 필요한 내용인가, 나 자신은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순환적인 물음들이 순수한 교사들을 괴롭게 만든다. 이 과정 자체에서 삶에서 어떤 정답이란 찾기 매우 힘든 것이며,
내가 생각한 것이 옳은 걸까?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삶의 무언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하는 자조적인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물음이야말로 교육적 허무주의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답을 내려 교사 스스로 일관적인 교육 철학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도 어렵지만, 전인적인 교육 효과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학생이 어릴수록 전인적인 교육은 같은 상황의 반복과 그에 대한 교사의 반응, 아이들의 반응이 오랫동안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공교육에서 학생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대개 1년 길어도 5년뿐인데, 그 짧은 시간 안에 교사 자신이 의도했던 지도 방침이 학생에게서 드러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거기에 더해 1년 후에 담임을 맡지 않으면, 그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교사는 알기조차 힘들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한 명의 낚시꾼과 같다. 자신이 세운 올바른 교육 철학을 아이들에게 꾸준히 던져놓고, 그대로 물고기가 잡힐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아무리 교육을 해도 학생을 둘러싼 가정, 사회적인 요소는 인적 인간 양성을 위한 교사의 노력을 너무 쉽게 무력화 시킨다.
교육의 성과를 쉽게 가시화할 수 있는 것은 시험 점수, 대학 서열화 등이다. 이러한 가시적인 기준으로 교육을 평가한다면 어떻게든 아이들을 내몰아서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의 진정한 성과가 시험 점수인가? 이런 가시적이고 근시안적인 목표를 위해 아이들을 내몰면서도, 교사 스스로는 그것이 올바른 교육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할 것이다. 교육은 시험 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성장을 위한 것임을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다.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47p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자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교사는 그 어떤 직업보다 자존감을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교육의 현실에서는 자신의 이상과 전혀 다른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들을 만나는 경험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요소들은 교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이에 교사는 그의 교육적 이상을 잃고 허무주의로 흘러가게 되기 쉽다.
교육 활동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사를 탓하며, 심지어 교사 스스로도 자신의 부족함만을 생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교육적 허무주의는 사실 나에게만 해당될 수도 있다. 내가 첫 발령 때부터 주로 몰두해온 주제가 "교육적 허무"였다. 실제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계획적 교육은 그저 "이름 붙이기 교육"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너무 순수한 이상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참교사도 아니고 평범한 교원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리고 현실에 몸을 담고 지내는 소시민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정도만 다를 뿐 모든 선생님들이 다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부분에서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한 감각을 가졌을 뿐이다.
나의 교육적 허무감은 실제로 자아의 허무주의를 불러왔고, 니체와 실존주의를 만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다음에는 니체와 실존주의 철학으로 교육적 허무주의를 깨뜨릴 수 있는 관점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