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을 창조해 낼 수밖에 없었다.
1. 인간은 자유를 꿈꾸면서도 어떤 대상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싶은 이중적인 본능을 동시에 가진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불완전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현실보다 완벽하고 무언가를 숭배할만하다고 '느낄 수 있을만한 대상에게 복종하고자 한다.
2.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현실과 거리가 있는 곳에서 복종할 대상을 찾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완전히 긍정할 수 없는 인간은 주위에 있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숭배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인간은 그 사소한 것 때문에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고 느끼고 삶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숭배할 만한 무언가가 그토록 비참한 자기의 현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을 리가 없기에 자기 주변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은 '신'이 있을만한 공간과 시간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신을 찾기 마련이다. 인간은 '신'을 통해 삶을 정당화하고 존재를 신성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위의 2가지 본능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신 창조 본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신 창조 본능'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창조해야만 했던 이유다. 신을 창조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도 이중적인 인간의 본능을 해소하지 못하면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다. '신'의 존재는 이 모순적인 본능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의 창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이중적 본능을 해소하고, 불안감을 달래며 현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삶의 정당화와 존재의 신성화, 이것이 신이 창조된 본질적인 이유다.
한 인간이 창조본능에 따라 창조해 낸 신은 인간의 경험 축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떤 인간이 창조한 신은 그 사람의 경험과 그로 인한 생각의 결과들이 축적되어 어떤 것을 숭배할 것인지 정한다. 그 경험이 좋은 경험인지, 나쁜 경험이든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관점은 다르기에 여기에서 선과 악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인간 사이의 가장 잔인한 전투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전투는 보통 숭배에 대한 강요, 신의 유일성과 완전무결함 그리고 실재성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한다.
창조된 신에 대해 논리를 가지고 '이해'하려 하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논리적인 이유를 찾고자 하면 그 신에 대한 믿음은 곧바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뿐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의 또 다른 말은 사랑이다. 모든 의심과 편견을 거두고 어떤 대상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보다 길가에 있는 돌멩이를 더 사랑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보다는 돌멩이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신은 완전한 믿음이자 사랑이며 삶의 지표이기 때문에 한 인간은 서로의 신에 대하여 설득은 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숭배해야 하는 유일신은 없다. 우리가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모두 신이 될 수 있다. 신은 인간이 살기 위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만 - 불안함을 없애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 할 뿐이다. 그 대상이 유일신, 인격신, 학문, 예술, 사랑 아니면 다른 사람 등 어떤 대상을 완전히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한 존재에게 신이 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유일신을 숭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유일신이 모든 인류의 평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같은 유일신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각각의 신을 창조, 설정하여 모두 불안함을 달래어 현실을 보다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신을 강요하는 사람은 그가 믿는 유일한 창조자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유일신이나 다신교 범신론도 아니다. 인간의 모순적인 '신 창조 본능'을 서로 인정할 때이다.
신은 완전무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한 인간의 불안감을 믿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신의 역할은 끝이다. 인간은 모순적인 본능의 해결을 위해 현실을 초월한 완벽 무결한 존재를 상상하기 시작했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모든 사람이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 - '자신만의 신'- 을 숭배하기 원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신은 유일하지도 않다.
신이 눈앞에 현존해야 믿는다면 그는 신을 설정하지 못한 것이다. '실재성'은 '신'이라 불리는 것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싸운다. 그러나 신의 실재성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안정감을 박탈할 뿐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 안에 있는 수많은 신들이다. 하나의 존재에게도 수많은 신이 있을 수 있다. 신의 또 다른 이름은 가치 기준이며, 내면 안에 있는 수많은 신들의 전투의 결과로 각각의 신들에 대해 명령-복종 관계가 성립된다.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명령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의 명령을 얼마나 따를 수 있는가의 정도에 따라 내면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정해진다. 내면의 위계질서가 제대로 정립된 사람은 신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글을 잘 따라왔다고 가정했을 때 '신을 창조하지 못한 인간은 살 수 없다'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오로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에게 신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신 창조 본능은 인간의 무한한 창조 본능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