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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쌤 Dec 19. 2023

[북리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밀러

 



 이번에 리뷰할 책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처음엔 재미가 별로 없었는데, 읽다 보니 반전도 있고 재밌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싫으면 책을 읽고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으신 분

 한 사람의 의미 찾기 과정을 보고 싶은 분

 반전 있는 책을 좋아하시는 분

 미국의 우생학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

 

룰루 밀러와 데이비드 스타 조던


 먼저 줄거리와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두 사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룰루 밀러는 이 책의 작가이자 주인공이며 과학 전문 기자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녀가 파헤쳤던 인물이다. 그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며 평생 물고기를 연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더 많은 정보는 책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 여기까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줄거리


 작가는 해변에서 한 여인과 키스를 한다. 그것을 알게 된 남편은 그녀를 떠났다. 그녀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다.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한  작가는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와 원동력이 되는 힘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저명한 어류학자의 삶과 문장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헤맸다. 수많은 물고기를 잡아서 '어류'라는 종을 개척해 낸 그의 삶과 사상에서 자신의 혼란스러운 삶을 정돈시킬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데이비드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어류'의 분류와 정의에 대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작가는 그에게서 실제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데이비드를 조사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던 중, 그녀는 데이비드가 자기기만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적절한 자기기만이 데이비드가 절망할 순간에 다시 일어나게 도와줬으며, 그에게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기서 책의 결론을 성급히 내린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자기기만이 필요하다'라고 말이다.그러나 여기에서 반전과 작가가 주려는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데이비드의 자기기만은 그 정도를 넘었다. 그가 어류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보이고 불굴의 의지로 살아간 것은 물고기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아니라, '어류'라는 종을 인간의 아래에 두기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데이비드가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스탠퍼드 여사의 살인사건과 미국에서 비인간적인 '불임화'의 주도자였음을 알게 된다. 이후 작가는 데이비드의 행적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 후 작가는 새로운 학문인 '분기학'을 접하게 되고 사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류'가 없어진다는 것은 데이비드가 집대성한 '어류'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으며, 이는 작가가 혐오하고 데이비드가 열렬히 지지했던 우생학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다. 데이비드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 데이비드가 구축해 둔 세상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목의 이유


 이 책의 제목은 결국 우생학의 비인간적인 사고와 자연을 인간의 편의대로 설정하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깨어버릴 망치로 사용했다. 우생학이 사라져 버린 자리는 평등과 자유, 존중이 들어서길 바랐던 것 아닐까? 어쨌든 작가는 삶의 혼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양성애자인 자신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행복하게 살아가게 다. 이제 그녀에게는 현재의 삶 자체가 삶의 의미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제목에 대한 의문점이 생겼다. 사실 물고기가 아니라 '어류'라는 학문적인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의미 찾기 본능


 이 책은 허무주의(책에서는 혼돈 등으로 표현된다)와 그에 대한 반작용 - 의미 찾기 - 에 대해 이해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어렵다. 인간은 의미를 느낀다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허무의 늪에 빠져버린다. 작가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허무주의를 느꼈다. 그것도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고 존재를 인정받아야 할 아버지의 한마디 말로부터. 그렇기에 어쩌면 작가의 의미 찾기, 자아 찾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허무를 마주한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허무를 마주한 이상 인간의 의미 찾기는 생존 본능이며, 의미를 창조할 때에만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허무주의를 느끼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느낀 후에 작가는 또다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무언가에 열중하며 평생을 바쳤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그 답을 찾으려 했다.


데이비드는 왜 우생학에 대한 믿음을 놓지 못한 것일까?


 그녀의 간절한 믿음처럼 데이비드는 '어류'를 통해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작가는 데이비드가 가진 삶의 의미 방향성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대적 유행 등을 생각해 보아도 데이비드의 우생학은 인간이 쉽사리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닌 극단적인 사상이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와 그 당시의 사람들은 왜 우생학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을까? 그들은 우생학이 옳은 것인지 생각하긴 했을까?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할 수도 있다. 그저 우생학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우생학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하나의 '신'이었다.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허무함, 무력감을 느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작가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허무주의 극복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허무주의 극복은 너무도 비인간적이었고, 극단적이었다.


작가는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된 것은 아닐까


 위에서 살펴봤듯 삶에의 의지, 동기부여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이 삶의 의지로 삼는 대상은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그중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목표도 있다. 인간이 삶에 의지로 삼는 대상 또는 사상을 가지는 것은 이성보다는 본능이다. 본능은 우리를 살아가게 해 주지만 항상 옳은 -도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찾은 의미 가운데에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싹틀 것이 분명하다. 데이비드 조던 스타에게 우생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허무주의를 인간의 생명력에 퍼진 독(毒)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미 찾기는 그 독을 풀어주는 해독제이다. 즉, 데이비드가 우생학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작가는 데이비드와는 다른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작가는 평등주의, 민주주의 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렇다면 우생학처럼 진화론, 평등, 민주주의 등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아닌 삶의 의미는 아예 싹을 잘라야 하는가?


 가치 평가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 가치평가에 대한 고민은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신적 투쟁과 성장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복잡하고 괴로운 고민이 된다.


우린 평등하지만 너 같이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빼고 평등해.
너는 그런 악한 생각을 하다니 정말 가치가 없구나.



 이것은 또 다른 이름의 우생학, 사상적 우생학 아닌가? 평등을 외치면서 그렇지 않은 사상을 가진 자들은 모두 배척하는 모순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잘못되었음에도 그것을 인간의 ' 의미 찾기 본능'이라며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이건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생학은 왜 잘못되었는가?


  우생학은 인류의 유전학적 개량을 꿈꿨다. 그러나 인류의 유전학적 개량은 인간을 더 개량시키지 못한다. 우생학은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핵심은 종의 '진화' 즉, 하등생물과 고등 생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물 진화의 환경 선택과 다양성이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개량을 위해서는 - 사실 개량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 종의 번성을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성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생학을 적용한다면 우리 인간의 다양성은 매우 떨어지고 종의 보존이 아니라 멸종이 다가올 것이 뻔하다.


  또한 우생학은 인간의 신성성을 없앤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처럼 진화론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움으로써 신성성, 고귀함을 지워버렸는가? 아니 오히려 인간의 신성성을 확장했다. 인간이 신성하고 고귀한 이유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동물보다 더 고등 생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신이 우리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주어서도 아니며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인간이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인 이유는 대자연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성한 게 아니라 자연과 생명 그 자체가 신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존재는 자연 그 자체이며, 자연을 이루는 모든 것과 하나 되는 단일성을 느낄 때 우리의 정신은 신성함을 얻고,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감하는 능력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우생학이 논리적, 이성적으로는 맞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인간은 논리나 이성으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다. 공감과 자율 또한 인간을 규정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우생학이나 불임 시술 등은 아주 극단적인 이성적 유토피아를 따를 뿐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와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배려하고, 함께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인간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생학자들은 틀렸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조던이 채택한 우생학이라는 해독제가 옳지 않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사상의 가치 평가를 포기하고 완전히 상대주의적으로 가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충동적인 본능의 사상을 가진 자를 존중하고 믿어야 한다. 대신 그 충동 본능을 최대한 적절히 발휘하도록 어릴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우리가 학문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믿고 있는 것들을 모두 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런 면에서 소크라테스는 영원히 인류 옆에 남아있을 것이다. 분류학에서 규정한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명 났듯, 분기학 또한 틀렸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 우리가 믿고 있는 진화론과 생명의 단일성 또한 틀렸을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동물과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가졌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학문적이든, 사상이든 아니면 삶의 태도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저 믿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삶의 어떤 가치를, 왜 따를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검토를 하다 중간에 지쳐 어느 한 지점에 귀의할 수도 있지만 검토를 통해 내가, 우리 주변이, 인류가, 자연이, 우주가 더 나아가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 생각하며 살아가며 자아를 초월하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치며


 작가의 자아 찾기 여행이 중간에 끝나지 않고, 어류를 없애면서 자신의 의미를 찾으면서 끝난 점이 인상 깊다. 무엇이 되었든 그 의미를 찾아 혼자 떠난 여행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언젠가 또 다른 의미를 찾으러 떠나겠지?


 앞으로 내 기억 속에 물고기를 계속 떠올려야겠다. 아니, '어류'를 떠올리는 게 맞을 것 같다. 형식에 고착되고 창의성을 잃을 때,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물고기를 떠올리면 나의 언행과 사상을 다시 한번 검토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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