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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이 Sep 05. 2022

상쾌한 땀, 자전거

취미일기, 세 번째 취미 ~ 자전거 ~

그저 한 번만, 딱 한 번만 힘껏 발을 차면 되는데 두려움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사실은 자전거를 타는 데에는 어떤 복잡한 메커니즘이 필요하고 - 특정 버튼의 조합으로 발현되는 격투 게임의 궁극기처럼 - 수많은 다양한 시도 끝에 그 메커니즘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눈앞에 자전거의 악마가 펑! 하고 나타나서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움직임을 기억하면 돼! 오른쪽 엉덩이 근육을 활용하는 게 중요해. 이제 알겠지? 너는 이제 자전거를 마음껏 탈 수 있을 거야.' 하고 확인과 인증(?)을 해준다고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은영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보글보글 파마를 하고 안경을 낀 동글동글한 인상의 아이였다. 은영이랑 어떻게 친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장 친한 친구는 은영이었다. 은영이는 자전거를 탈 줄 알았다. 어느 날 은영이는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내가 가르쳐 달라고 했던가? 기억이 모호하지만 어쨌든 그러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로 빼곡한 신시가지 내에는 그다지 우리가 놀 곳이 없었다. 우리는 찻길에서,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밀고 끌고 타며 고군분투했다. 은영이는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가 가장 재밌다고 했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기 때문에 은영이가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걸 도착 지점에 서서 늘 부러운 눈으로 올려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왜인지 나도 그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가르쳐주다 지겨워진 은영이가 내리막길로 향하자 나도 은영이를 따라갔다. 은영이가 먼저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달려 내려간다. 나도 핸들을 붙잡고 길 꼭대기에 섰다. 안장에 올라타 브레이크를 꼭 잡기 위해서 손가락을 한껏 펼친다. 땅을 딛고 서 있던 발을 떼자마자 자전거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무섭게 속도가 붙어서 나는 넘어질까 두렵다. 그러나 잠시 휘청이던 자전거는 이내 바퀴를 굴리며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로 선 자전거는 평지에 다다랐고 나는 페달에 얹고 있던 발을 힘껏 굴렀다. 나는 이제 넘어지지 않았고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버렸다. 은영이도 놀랐고 나는 더 놀랐다. 이거구나,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야 넘어지지 않는구나. 머릿속이 환해졌다.


점점 커가면서 나는 자연스레 자전거를 타지 않게 되었다. 자전거를 둘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도시에서는 마음껏 자전거를 탈 곳이 없었다. 이따금 넓은 공원에서 자전거를 빌려 탈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자전거 타는 법은 잊히지 않았다.


그러다 공유 자전거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도입되었다. 본격적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곳도 있었고 기업이 들어온 곳도 있었다. 서울은 전자였고, 부산은 후자였다. 팀 버튼 전시를 보러 갔던 어느 해의 여름, 이름도 귀여운 초록색 따릉이가 나란히 주차된 모습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오랜만에 자전거, 타볼까?


땀을 뻘뻘 흘리며 스마트폰으로 본인 확인을 하고 이용료를 결제하자 잠금쇠가 찰칵하고 풀렸다. 걷기에는 조금 멀고 차를 타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인 신촌에서 홍대까지. 신촌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홍대에 가서 반납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으나 자전거 도로가 없어 결국 한참을 자전거를 밀며 걸었다. 중간중간 따릉 따릉하는 경쾌한 경적을 울려본 게 다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에서도 노란 자전거가 더러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백수였고, 시간이 많았다. 매일 GPS를 켜고 자전거를 찾아 돌아다녔고, 신나게 타다가 그만 타고 싶으면 그냥 그곳에 두고 오면 됐다. 지정된 장소에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고 몇 배는 편리했다. 무료 체험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비용을 지불하고 공유 자전거를 이용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찾을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어느 주택가, 어느 아파트 단지까지 찾아 들어갔는데 정작 자전거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사유화해버린 자전거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철수를 선언했고, 낡아버린 노란 자전거들이 트럭에 가득 실려가는 모습을 본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의 일이다.


출퇴근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구한 나의 첫 자취방은 새로 조성된 신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여느 신도시들처럼 아파트 단지로 빼곡했지만 공항과 멀지 않은 곳이라 고층 아파트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경사로가 없는 평지였다. 자전거 도로도 잘 닦여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위시리스트에 담아놨던 자전거를 살 때가 온 것이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베이지색 자전거 '가을이'는 나의 가족이 되었다.


자취방이 있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나는 매번 가을이를 낑낑 대며 이고 내려가서 낑낑 대며 지고 올라와야 했다. 하지만 뻥 뚫린 자전거 도로를 달리며 맞는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너무 상쾌했기에 충분히 감수할만했다. 퇴근 후 다 벗어던지고 드러눕기 바빴던 내가 어느새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비록 1시간도 채 타지 못하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나갈 때마다 걸어서는 갈 수 없었던 카페며 마트에 들러 바구니가 간식으로 가득 해지는 루틴이었지만 그래도 땀을 흘리고 들어오면 기분이 좋았다.


직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던 나날들. 씻고 유튜브나 뒤적거리다가 삭제된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잠들던 퇴근 후의 시간들. 아무리 일찍 잠들어도,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도 좀처럼 풀리지 않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누그러졌다. 퇴근 후에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면 오히려 활기 있어지는구나, 나는 또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해보지 않고선 모른다지만, 사실 모두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몸을 설득하는 과정이 고되다. 가을이는 지금 창고에 들어가 있다. 아침저녁 다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오랜만에 가을이 상태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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