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
추태영 연출의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는 1994년 있었던 르완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 무카루만지와 2020년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처를 연결하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무카루만지는 생존 했지만 느탐바라는 13살의 그 여자 아이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잔혹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그녀를 살해한 것이다. 무카루만지가 자신을 살해한 느탐바라를 용서하는 모습에서 연출자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누군가를 과연 용서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위쪽 무대에는 작은 손 글씨가 적힌 대형 종이가 무대 천정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있고 영상 스크린으로 사용된다. 아래쪽 무대 양쪽으로 두 개의 마이크가 있다. 상수 쪽 작은 책상과 의자는 연출자를 위한 것이다. 연출자는 직접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사건 자료를 브리핑한다. 배우들은 나무의자에 앉아서 또는 마이크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음향, 조명, 의상, 무대 장치의 간결함은 관객이 오롯이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연극은 연출자와 배우들이 개인사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미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과정과 무카루만지가 느탐바라를 용서하게 되는 과정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지적 욕구를 갖고 온 관객은 배우와 연출자가 고백하는 사적 상처들을 마주하게 된다. 공연자들이 겪었던 가정폭력, 성추행, 실연과 배신, 소외의 기억과 상처는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의 사적 경험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스크린에서 무카루만지가 느탐바라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공연자도 무대에서 자신의 마음속 미움을 설토한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사적 사건에서 발생하는 용서와 화해는 결이 달라 보인다. 무카루만지의 미움은 민족 대학살이라는 참혹했던 역사 속 한 장면에서 발생했다. 반면 배우와 연출자가 무대에서 말하는 미움은 개인사 속 참혹한 장면에서 발생했다. 무카루만지의 사건에서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분리가 가능한 독립된 존재다. 그리고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공연자들이 겪었던 사건에서 대부분의 가해자는 가족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분리가 불가능하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진심이 담긴 사과가 필요하다. 가해자가 나약하고 불쌍해 보여서 용서해야 한다거나, 가해자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에 죄가 없으니 화해해야 한다는 통념은, 사회가 피해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무카루만지는 느탐바라를 5번째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를 용서하거나 화해할 수 없었다. 6번째 그가 무카루만지를 찾아왔을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왔다. 그는 아내와 무카루만지 앞에서 잔인했던 살인 장면에 대해 고백하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느탐바라가 자신의 아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자, 무카루만지의 마음에서 용서의 마음이 일어났다. 공연이 끝날 무렵, 공연자들 대부분은 미움에서 벗어나 화해한다. 몇 명은 왜 화해해야 하는지 여전히 질문한다.
느탐바라가 살해한 것은 단순히 무카루만지의 육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도 살해했다. 그녀의 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미움과 치욕이라는 죽음의 세계 안에 살고 있었다. 무카루만지는 자신을 괴롭히고 못살게 했던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살인자 느탐바라를 용서한다고 했다. 그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이 공연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역사적이건 개인사적이건 간에 우리는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왜 미워하는 과거의 마음속에 갇혀,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을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먼저 상처 받아 찢어지고 꼬꾸라졌던 자신의 마음에게 손 내밀어 위로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화해해야 할 대상은 가해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공연정보
기획: 두산아트센터
작: 추태영 백지영
연출: 추태영
출연: 이경훈 김수민 이창민 박석원 조수지 강수현 김설빈 김윤아 정아람
쇼케이스 70분
공연일시: 2020.02.20 ~ 2020.02.22.
장소: Space111
사진출처: By The Dilly Lama - https://www.flickr.com/photos/dylwalters/1196722482/,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532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