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가 된 팝아티스트
1976년 11월 24일, 당시 48세였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미국 국세청 조사에 대비하기 위해 비즈니스 메모 및 비용을 기록할 목적으로 오랜 친구인 팻 해켓(Pat Hackett)에게 일지를 작성하도록 요청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9시 앤디는 해켓에게 전화 통화로 전날의 항목에 대해 설명하고 해켓은 오전 중에 일지를 완성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앤디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감정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하고 일지는 일기로 진화하게 된다. 일기는 앤디가 사망하기 5일 전인 1987년 2월 17일에 멈춘다. 앤디 사망 2년 후인 1989년, 해켓은 10년 이상의 앤디 인생을 기록한 2,000페이지 분량의 일기장을 807쪽으로 압축 편집하여 '앤디 워홀의 일기' (Andy Warhol Diaries)를 출간한다.
넷플릭스 TV 시리즈 다큐멘터리 ‘앤디 워홀의 일기’는 이 책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앤드류 로시 (Andrew Rossi)는 일기를 6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각색하는데, 앤디가 해켓과 전화로 일기의 내용을 이야기했던 것에서 착안해 앤디워홀 가발을 쓴 비슷한 체구의 배우가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장면을 영화의 기본축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일기 장면에서는 앤디가 직접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앤디가 사망했기에 그의 육성으로 녹음이 불가하므로 택스트 음성 변환 알고리즘인 AI 기술을 활용하여 앤디의 디지털 음성을 구현하게 된다. 감독은 앤디의 영화, 사진, 회화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몽타주 하였는데 특히 앤디의 사생활을 촬영한 8미리와 16미리 영화 자료는 이 다큐멘터리의 예술적 완성도를 더해준다. 인터뷰이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전환 장면에서 감독은 현재의 인터뷰이를 아날로그 영화로 촬영하여 삽입하여 아날로그와 디지털 영상의 조화로움을 시도한다.
일기가 48세의 이미 성공한 아티스트의 모습에서 시작하는 것을 고려해 시리즈 1편에서 감독은 앤디의 성장과정과 성공에 대해 압축한다. 2편에서는 앤디와 연인 제드 존슨의 관계, 3편에서는 존 굴드와의 비밀 연애, 4편에서는 앤디와 장 미셸 바스키아의 협업, 5편에서는 앤디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와 《사랑의 유람선》 출연을 다룬다. 마지막 회인 6편에서는 에이즈의 창궐로 공포에 휩싸인 미국 사회, 존 골드와 앤디의 사망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시점이 앤디가 인생그래프에서 성공의 꼭짓점을 찍은 시기이다 보니 회차를 거듭할수록 아이디어가 바닥난 앤디의 고뇌는 더 깊어진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델에 도전하고 텔레비전 코미디쇼에 출연하고 '엔디 워홀TV'도 제작한다. 새롭게 급부상하는 스타작가인 바스키아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며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언어도 일기에 쓴다. 에이즈가 확산되는 시기, 주변 지인들의 감염과 사망은 앤디를 더욱 압박한다. 그는 에이즈를 ‘게이암’이라고 일기에 적었는데 이는 80년대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잘 반영한다.
워홀미술관 관장 페트릭 무어는 인터뷰에서 앤디가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었지만 오랫동안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1980년대는 절망적이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앤디는 아이디어가 다 떨어져서 경력이 끝났다고 느꼈다. 그는 팩토리 운영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부유층이 모인 사교계 활동과 미디어에 집착했다. 그는 그림에 돈을 쓸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을 잘 알아봤고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 큰돈을 벌었다. 텔레비전과 광고출연, 모델일 등은 모두 ‘앤디 워홀’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이었다. 그는 이미 크게 성공한 스타작가였고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술계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소외감을 느꼈다.
이러한 그의 감정이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다니엘라 모레라 기자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앤디는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 가정 출생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출신이다. 위로는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앤디도 평생 동안 매주 주말에는 성당에 갔다. 아버지가 14세 때 사망해서 가정이 어려웠고 앤디는 아르바이트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게이인 걸 알았지만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카네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게이라는 정체성에 괴로워했고 고통받았다. 뉴욕에 이주하고 나서 상업예술가로 일할 때도 그는 고객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심리적으로도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후 자신을 위장하면서 사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게이로서 주류층에 들고 싶은 마음을 가진 채. 앤디의 우상은 게이 예술가로서 명작을 남긴 테네시 윌리엄스와 트루먼 카포트였다고 한다. 이민자 예술가로서 그의 꿈은 미국 중산층에 속하는 것이었다.
1987년 2월 21일 앤디는 뉴욕병원에서 담낭 제거수술을 받는다. 이튿날인 22일 새벽 페니실린 알레르기 합병증으로 심장부정맥이 발생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그는 피츠버그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고 4월 1일 만우절에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