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한여름밤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지방 도시는 더위로 유명한 곳이다. 5월이 되면 이미 30도가 넘어가고, 6월부터는 33~35도가 기본인 나날이 9월까지 이어진다. 35도가 넘어가면 그제서야 오늘은 좀 덥구나,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어렸을 때는 40도가 육박한 날에도 밖에서 뛰어놀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더위의 특징 중 하나는 밤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해가 지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열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매일같이 열대야가 이어졌다.
에어콘 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은 은행 정도밖에 없던 시절이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되면 우리 가족은 은색 돗자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선형 모기향에 불을 붙이고, 돗자리에 누워 다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스르륵 잠이 드는 것이다.
나는 늘 동화책 속의 부모님처럼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졸랐고, 때로는 엄마가, 때로는 아빠가 노래를 불러주셨다. 엄마가 불러주신 것은 모짜르트와 슈베르트의 자장가였고, 아빠의 주 레퍼토리는 섬집 아기였다. 왜 하필 섬집 아기였는지는 모르겠다. 단조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이 그 때 형성된 것은 아닐까? 어쩐지 구슬픈 그 노래를 지금도 나는 퍽 좋아한다.
아빠의 목소리는 나즈막하고, 노래가락은 구성졌다. 엄마는 늘 아빠는 노래를 참 잘한다며 감탄하곤 했다.
때로는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아빠는 노모를 위해 눈 내리는 산을 지나 호랑이를 찾아가 곶감을 구해오는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곶감을 구해와 아버지의 병을 고친 이야기는 내가 사는 지역 곳곳에서 내려오는 설화 중 하나다. 다만 아빠가 해 준 이야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원전에서는 분명 아버지인 것이 아빠의 이야기에서는 노모로 바뀌어있다. 애초에 겨울은 곶감을 구하기 수월한 계절인데 왜 호랑이에게 곶감을 구하러 간 것일까? 더군다나 호랑이는 곶감을 무서워한다는 것이 우리 나라 설화의 정설이기도 하다. 언젠가 아빠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여쭤봤더니, 아빠는 당신께서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냐고 나에게 되물으셨기에 나의 궁금증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다. 아빠가 곶감을 무척 좋아하시긴 했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빠의 차에 타면 늘 나훈아나 문주란, 혹은 패티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트로트 하면 떠올릴 수 있는 흥겹고 신나는 노래보다는 적당히 구성지고 구슬픈 노래들을 더 좋아하셨다. 아빠가 특히 좋아하셨던 노래가 무엇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늘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준비해서 틀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 강제로 내가 틀었다. 그마저도 적당히 인기있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내가 고르고 고른 노래들이라 서태지, J POP, 그리고 아니메 송들이 가득했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두 분의 결혼이 결정되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엄마의 퇴사가 결정되어 송별회가 열렸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오기택의 우중의 여인을, 엄마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불렀다. 그 어떤 의미 따위는 두지 않고 그저 각자 좋아하는 노래를 선곡한 것이 분명하다는 게 뭔가 두 분 답다. 엄마는 아빠에게 있어 사나이 가슴을 울리며 저주하고 흐느끼는 여자가 아니었거니와 아빠 역시 엄마에게 있어 섬마을 총각 선생님이 아닌 그냥 노총각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당시 엄마는 21살, 아빠는 30살이었다.
*
딸.
아빠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목소리. 뜰도 아니고 떨도 아니고 딸도 아닌, 그 어드메에 있는 독특한 억양으로 아빠가 나를 부르던 소리.
나를 공주라고 부르던 엄마도 어느 순간 아빠와 같은 억양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원히, 나는 당신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