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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USDRUCK

실언

by 쾌주

어렸을 때 정확한 뜻도 모르고 마구 쓰던 말들이 많다.

한글을 일찍 배운 나는 집에 있는 모든 활자들을 읽어댔고, 거기에는 엄마가 보던 소설책들도 포함되어있었다. 새로 배운 단어를 자랑하고 싶었던 나는 엄마와 얘기를 하던 중에 아쉬운 일이 생기자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제기랄!"

깜짝 놀란 엄마는 그런 말을 어디에서 알게 됐냐고 했고, 나는 책에서 봤다고 했다. 엄마는 그 말들의 정확한 어원과 뜻을 알려주면서 뜻도 모르는 단어를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나를 엄중히 혼냈다. 이후 내겐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는 좋은 습관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나는 여러가지 단어들의 뜻을 오해하며 살아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실언이었다.


소설을 보다보면 대화를 하다가 한쪽이 내가 실언했네, 하면서 씁쓸해하며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 그 사람의 속내가 들어나는 말들이었기에, 나는 실언이 失言( slip of the tongue)이 아니라 實言(sincere)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실언을 했다며 상대에게 사과를 하거나 달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속마음, 진실을 말해놓고 사과는 왜 하는 걸까. 그럴거면 말을 말지.

이건 아마 공감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나의 성향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失言인지도 모르고 實言을 종종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주일만에 런닝을 나가니 어느새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병아리꽃은 그새 지고, 이팝나무가 계절을 빛나게 한다. 고향집 천변에는 수레국화와 개양귀비가 가득 피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능소화가 필 것이다.


아주 어릴 때 살던 집은 원래 마당이 있던 곳에 개축을 해서 만들어진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문을 열면 왼쪽에는 옆집 담벼락이, 오른쪽에는 우리집이, 정면에는 주인집이 있었다. 주인집은 기와지붕이 얹어져 있고, 마당과 마루가 깔린 집이었지만 우리집은 방 하나가 덩그러니 있고 시멘트에 슬레이트가 달린 지붕이 얹어져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옆집은 지금 생각해도 호화로운 그야말로 대저택이었다. 우리집 대문의 다섯배는 될 법한 웅장한 대문 옆에는 차고가 있었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초록 잔디가 깔린 정원이 있었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소나무가 둘러져 있었고, 한쪽에는 분수대와 파라솔이 있는 탁자가 있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져 뾰족지붕에 굴뚝까지 있는 2층 저택이었다. 우리집 옥상에서는 그 집 정원이 아주 잘 보였다. 외국에서 데려온 듯한 날렵한 사냥개까지 더해져, 나는 매일매일 옥상에서 그 집을 바라보며 소공녀 세라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우리집과 바로 맞닿은 담벼락너머에는 소나무 사이로 배롱나무와 능소화가 있어서 계절에 맞게 꽃을 피웠다. 자잘한 꽃이 가득 달리는 배롱나무와 달리 커다란 능소화를 보며 나는 그 꽃이 천박하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천박하다는 단어의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저 취향의 색과 모양이 아니라는 이유로. 좋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한 단어 중 하나를 갖다붙여서 그 꽃을 정의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북촌에 능소화 출사를 갈 일이 있었다. 어렸을 때 늘상 보던 꽃이었고, 그때까지도 천박하게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꽃이었기에 굳이 북촌까지 가야하나? 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기와지붕과 나즈막한 담을 타고 가득 피어있는 능소화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저 최선을 다 하여, 자신의 일을 다 해 피어나고 있는 것 뿐인데.

내가 또 알지도 못하면서 實言이랍시고 失言하였구나.


나는 조용히,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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