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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USDRUCK

런 온

운명을 믿어? 난 잘생기면 믿어

by 쾌주

런 온은 2020년 JTBC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다. 임시완, 신세경이 메인 커플, 최수영, 강태오가 서브 커플로 나오는 로맨스 드라마이며 내 인생 드라마이기도 하다. 드라마 블루레이를 사본 것은 처음이었고 너무 비싸서 깜짝 놀랐다. 당연히 아직까지 뜯지도 않았다.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으니 나의 친구라면 꼭 봐주면 좋겠다. 도파민은 다소 부족하지만 대사 하나하나가 참 좋다. 이 드라마를 통해 강태오는 나의 최애 남자 배우 중 한 명으로 등극했다. 평소 내가 좋아하던 이상형과 전혀 다르게 생긴 타입이라 스스로도 신기하다. 그는 94년생으로 얼마전에 제대했다. 대중들에게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남자 주인공으로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임시완의 배역 이름은 기선겸으로, 그는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다. 나는 런데이 라는 어플에 가입하면서 닉네임을 고민하다가 기선겸으로 하려 했는데 이미 등록된 이름이었다. 신세경의 배역 이름인 오미주도 마찬가지였다. 고민끝에 나는 기선겸이 라는 닉네임으로 가입을 진행했다. 경상도에서는 이름을 부를 때 선겸아, 라고 부르기보다는 성을 붙이고 끝에는 이 를 붙여서 많이 부른다. 임시와이! 신세겨이! 이런 식이다. 비슷한 느낌으로 기선겨미! 라고 읽어주면 좋겠다.


런데이는 달리기를 도와주는 어플이다. 나는 걸어다니는 건 좋아하지만 몸에 억지로 힘을 가해서 땀을 흘리는 활동을 정말 싫어했다. 초등학교때 운동회를 하면 달리기는 늘 꼴찌였으므로 상을 받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하나의 훌라우프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 뭔가를 하는 경기가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내 상대에게 질질 끌려갔고 내 인생에서 가장 창피했던 기억 중 하나다. 상대의 이름도 얼굴도 성별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학창시절 내내 체력장은 만년 5급이었고 100m 달리기 기록은 24초다. 이 기록을 찍은 후 성실하게 달리지 않았다고 엎드려 뻗쳐를 한 채 혼이 났다. 나는 정말 온 힘을 다 해서 달렸으므로 억울했다.

이런 내가 달리기라니. 20대의 나에게 넌 40대가 된 후 달리기를 운동으로 하게된단다, 라고 말하면 넌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쫓겨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2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2월에는 3번, 3월에는 6번, 4월에는 9번 달렸다. 5월에는 10번 달리는 것이 목표다. 어제 달린 것이 7번째였으니 최대한 달성해볼 생각이다.



***



자발적으로 운동이란걸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대략 10년쯤 전이었다. 일찍 퇴근하면 10시, 야근을 하면 2시, 간혹 철야, 그리고 주말 출근. 이런 생활을 6개월쯤 지속하자 이대로 가다간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운동비를 지원해줘서 많은 사원들이 이용하는 헬스장이 있었다. 대치동이라는 특성상 시설이 무척 좋았다. 롤스로이스를 처음으로 본 곳이기도 하고 연예인들도 종종 온다고 했다. 샤워실이 아니라 제대로 된 목욕탕이 있어서 철야 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궜다가 다시 사무실로 오곤 했다. 멍한 머리로 책상 앞에 앉아있노라면 이대로 기절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것 같은 때가 있었다.

인바디 결과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트레이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계에 오류가 난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재 보라고 해서 한번 더 쟀다. 사람의 근육량이 이렇게까지 적을 수는 없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럴 수 있었다. 간단한 기구들 사용법을 익혔고, 꽤 재미있긴 했다. 그리고 회사가 판교로 이사하면서 나의 운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에도 이것저것 운동을 해 보긴 했지만 오래 한 건 없었다.


예기치 않게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고 있던 어느 날, 이대로 가다간 안되겠다 싶었다. 수영을 할까 했지만 날씨가 추웠고 수영장은 멀었고 강사는 무례했다. 무엇보다 지갑사정이 피폐했다. 홈트레이닝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나는 나를 잘 안다. 밖으로 나가서 기록이 남는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런데이 어플을 깔았다.

음악을 들으며 어플의 음성이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상쾌한 바람을 느껴 보세요! 운동이 끝난 후의 보상을 생각해 보세요! 허리를 펴고, 이제 30초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5분을 걷고, 1분을 달리고, 2분을 걷는다. 다시 1분을 달리고 2분을 걷는다. 이렇게 30분을 진행하고 마무리로 다시 5분을 걷는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할만했다. 회차가 늘면서 1분은 1분 30초가 되었고, 2분이 되었고, 2분 30초가 되었다. 3분은 3분 30초가 되지 않고 바로 4분이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4분 30초도 없이 5분이 되었다.


2분대까지는 걸음 수를 셌다. 3분대부터는 음악에 집중했고 4분대에 들어서는 자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팔자걸음을 걸었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으며 혼이 난 후 팔자걸음은 고쳐졌다. 하지만 발을 질질 끄는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내 신발 뒤축은 무척 빨리 닳았다. 그때는 신발을 여러 켤레 가지고 있지 않아 더 그랬다. 어디선가 걸을 때는 발뒤꿈치부터 시작해서 발가락까지 발바닥 전체가 바닥에 닿도록 걸어야 한다는 글을 보았고 나는 이를 의식하면서 실천에 옮겨 발을 끄는 버릇을 고쳤다. 이후 신발을 여러 켤레 갖게 되면서 뒤축도 훨씬 늦게 닳았다. 다만 언제나 신발의 바깥쪽만이 닳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발목 외전 abduction 이라는 건 몇 년 전에 알게 되었다. 다만 나는 평발 수준으로 아치가 무너져 있는데 이 경우는 내전 adduction 이라고 해서 신발 안쪽이 먼저 닳는다고 한다. 외전일 경우와 내전일 경우에 따라 각기 다른 타입의 운동화를 신어야 보조가 되기 때문에 나는 어쩌란 말인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당장 운동화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발을 끄는 버릇을 고친건 다행이었지만 발뒤꿈치부터 땅을 딯는 방식은 달리기를 할 때 매우 적당하지 않다. 오래 걷거나 잠깐만 달려도 늘 정강이와 발등이 아파오곤 했고,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봤을때, 헬스장에서 트레드밀을 달릴때, 복싱을 배울 때 왜 나만 쿵쿵거리며 뛰는 것일까 생각했는데 이게 바로 원인이었다. 몸에, 특히 발목에 힘을 빼고 땅을 딛고 밀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짝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뇌는 부정형을 이해하지 못한다. 몸에 힘을 주지마! 라고 외치는 순간 내 온 몸은 순식간에 뻣뻣해지고 마는 것이다. 발목에 힘을 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에 힘을 빼면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달리는 내내 이 상태를 무한반복하고 있으면 5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면 정강이 대신에 허리가 아프다.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더니 달리기를 위해 코어와 근력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달리기는 우울증과 다이어트에 좋다고 한다.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만큼 성실하게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별 효과는 없다. 다만 뭐라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은 위안이 된다. 인스타 스토리에 꾸준히 올렸더니 주변 사람들이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착각해준다는 점도 조금은 좋다. 하얀 운동화를 다섯 켤레, 검은 운동화를 세 켤레 가지고 있어서 다음 운동화는 무슨 색을 살지 고민해보는 시간도 즐겁다. 내가 지네라고 생각해도 좋다. 어린 시절 글자 그대로 마르고 닳도록 운동화를 신었던 보상심리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때는 애초에 하나 이상의 신발을 가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의 아이템을 호크룩스처럼 소중히 여겼다. (호크룩스란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에 나오는 악당이 가진 물건으로, 그의 영혼 조각이 담겨 있다. 파괴되면 큰일나기 때문에 늘 가까이에 둔다. 비슷한 말로는 문신템이라고도 한다.)


올해 내로 5km 마라톤에 나가보고 싶다. 10km 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5월 내로 조금은 더 가볍게 힘을 빼고 달릴 수 있게 되면 좋겠다. 6월, 아니 7월부터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고 10시, 아니 11시까지 출근을 하고 싶다. 할 수 있을까? 하면 된다. 안되는 건 없다.


이 글을 보는 당신도 런 온을 보고 달리기를 해 보길 권한다. 런 온을 보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DSC_5260.JPG Nikon D-50 28-80 / since 2001 - 2008. / 달리기를 전혀 하지 않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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