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USDRUCK

타인의 고통

by 쾌주

한때는 남자들의, 혹은 이공계의 대표 단점으로 여겨지던 공감능력 없음이 mbti붐이 일면서(사실은 상당히 한 물 가버렸지만) 다시금 튀어나오고 있다. 예전에는 고민을 들으면 공감보다 해결해주고 싶어 한다,라는 변명거리도 있었는데 요새는 그마저도 없다.


나는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어릴 때는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내 고통을 털어놓기 바빴고 그런 나에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이도 없었다. 20살이 넘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시작하면서 종종 타인의 고통을 접할 때면 무엇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난감했다.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에게 이런저런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그건 그래서 할 수 없다는 친구를 보며 대체 어쩌란 말이지? 하고 생각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에게 짧은 시간이었으니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위로를 건넸더니 넌 몰라, 하는 매몰차면서도 눈물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크게 상처받은 와중에도 대체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화도 났다. 그저 손을 잡고 꼭 안아주기만 했어도 그런 대답을 듣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친구에게도 이 정도이니 완전한 남, 타인의 고통은 솔직히 내 알바가 아니었다.


사는 데 있어 나만의 신념이 생겨나고 기준이 만들어지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하니 어쩌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른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른 사람이란 일본의 논객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라는 책에서 설명하는 어른과 흡사한 개념으로, 여기서 설명하기엔 너무 기니 흥미가 있다면 해당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불특정 다수의 인간은 흥미롭다. 하지만 개개인의 사정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하지만 내 사정에 관심을 가져준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과외를 시작하면서 이 마음과 욕망이 조금은 충족되었는데 동시에 다소 부풀어 오르기도 한 모양이다. 얼마 전 어떤 모임에 갔다가 어떤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그만 꼰대발언을 하고 말았다. 다 지나간다고, 시간이 흐르고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마음을 너무 닫지 말라는 말을 했다. 나 또한 다 경험해 본 감정들이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얘기였다. 그러나 그런 나의 마음은 전혀 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상대는 적대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부정적인 답변을 돌려주었다. 한동안 다정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자만했던 것 같다. 그런 눈빛을 접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했다. 나의 해석이 맞다면 그 눈빛의 의미는 본인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입을 다물었고 이후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만 쳤다. 모임이 끝나고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 사람은 아니에요,라는 말 없이 다소 우월감이 담긴 눈빛으로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모든 해석은 나의 주관적인 입장이므로 실제 그 사람의 감정과 마음은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당일에는 다소 우울했다. 내가 맞장구를 치는 동안 그 사람의 여러 가지 화법들이 내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과 상황에 대해서 미리 안다고 해서 대처를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에 심취하고 자기 연민에 빠진 나머지 타인의 꿈을 짓밟고 무시하는 것은 내 기준에서 바르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그런 내용을 지적했다면 그 모임의 분위기는 상당히 나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적대시하는 다른 사람이 또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어떻게 해서든 나를 이겨보고 싶은 듯, 선을 넘은 농담을 하며 나를 자신이 생각한 어떤 캐릭터로 몰아가려 했다. 물론 이 또한 나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농담이 섞인 가볍고 유쾌한 논쟁 또는 대화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말싸움이 아니다. 애초에 왜 대화를 하면서 상대에게 이기거나 졌다고 생각하는지를 잘 모르겠다. 나에게는 이길 수 없다거나 졌다고 생각하고 또 이를 입 밖에 내는 사람들이 이상할 따름이다. 이런 나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것은 정말로 나와 친한 친구 한 둘 뿐이다.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통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감정까지는 아니고 일종의 속상함 정도였고, 이 감정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기에 나는 나 자신에게 실컷 공감해 주었다. 속상했구나.

다음 날이 되어 나는 그 사람의 사정에 대한 것은 거의 잊어버렸다. 다만 속상했던 기억만이 남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기록으로 남겨야지. 오랜만에 느낀 감정이니까. 쓰고 보니 어쩐지 쟤가 나 속상하게 했어요! 하고 일러바치는 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동의한다 해도 티는 내지 말기 바란다. 내가 속상할 테니까.


오래간만에 주제에서 아주 멀리 떠내려와버렸다. 그러나 내 글을 그럭저럭 읽어 온 독자들, 혹은 글쓰기 모임 분들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대충이나마 알아차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느라 내가 속상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 역시!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반성하길 바란다. 당신은 타인의 고통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더 노력할 테니, 당신 역시 나와 함께 바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무시당하고 짓밟힌 내 꿈 중 하나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솔직함의 미학